mbti 과몰입이 발작버튼이라면
작은 수술을 앞두고 겁을 내고 있었습니다. 수술 장면을 상상하니 끔찍한 기분이 몰려왔지요. 저도 모르게 “으악! 무서워! 병원 가기 싫어!” 하고 괴성을 질렀습니다. 남편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저를 보고 휴가를 낼 테니 병원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오빠가 가준다고 안 아픈 것도 아니야.” 그 말을 들은 남편도 “그건 그래.” 하고 대답했습니다. 5초 정도의 정적이 흐른 후 우리는 푸하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이거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대화 맞아? 우리 너무 쿨하잖아, 하고 말이지요.
감정보다 논리적 판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 부부는 요즘 유행하는 MBTI로 따지면 T형(사고형: 원리원칙이 중요하고 이성적이며, 목표 달성이 관계보다 앞선 유형, 16가지 성격유형의 특성(개정판), 김정택, 심혜숙, 어세스타, 2005)입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효율을 먼저 따지지요. 그러니까, 어차피 아픈 날 휴가를 써서 힘들게 하루를 날리느니, 고생은 혼자 하고 다른 날 즐겁게 노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의 모습은 사무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편하고 좋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오롯이 필요한 데에 집중해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MBTI가 유행하면서 우리는 특이하듯 잘 맞는 각자의 성향을 이야기하며 서로를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심리학자가 요즘 유행하는 MBTI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내비칩니다. MBTI는 심리학이 아니야! 하고 말합니다. 저 또한 그런 유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거의 발작 버튼 수준이었습니다. 실제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학문적으로 MBTI에 접근해 본 적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MBTI가 정말 그렇게 나쁜 도구일까요? 이렇게까지 배척하기엔 제법 아까운 도구입니다. 심지어 수많은 대학의 상담실에서는 MBTI를 실시하고 있지요.
MBTI는 캐서린 브릭스와 그의 딸 마이어스가 함께 개발한 비진단성 성격 유형 검사 도구입니다. 심리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개발한 도구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크지요. 하지만 그들이 검사 도구를 개발하기 위해 착안한 이론은 정신분석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칼 융의 심리 유형 이론입니다. 물론, 그 시대의 많은 이론이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아이디어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과학적 연구를 하는 현대 심리학에서는 심리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의 발전이 불완전하고 추상적인 고전 심리학 이론을 토대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고전이 없이는 현대도 없지요, 검증 불가능하다고 무조건 틀렸다고 규정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경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리고 수많은 표본에 의해서 통계적 자료가 쌓이고 있다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학문’으로써 제법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요?
MBTI를 오랫동안 미워하다가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한 게시글을 보고서였죠. 무한도전이라는 예능 프로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댄스 스포츠라는 주제로 긴 여정을 달려온 멤버들이 대회를 마치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콧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는 멤버가 있었습니다. 박명수 씨였지요. 그 장면에 이런 제목이 붙어있었습니다. ‘F들 사이에서 곤란해하는 T’. 예전 같으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취급을 당했을 장면이 웃음 소재로 활용된 것입니다.
T형인 저는 살면서 여러 번 자신을 원망해왔습니다. 예쁜 포장지 속 선물에 정성껏 쓴 편지를 꽂아 주는 친구를 보며, 실용적인 물건만 덩그러니 전해주는 제가 참 인간미 없게 느껴졌습니다. 공감보다는 논점을 찾고 문제부터 해결하려는 대화 태도가 매몰차게 보였습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고, 나답지 않은 나를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무거운 마음으로 살아갔지요. 그렇다고 억지로 흉내 낼 수도 없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다정함을 노력해 본들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요.
하지만 MBTI가 유행하면서 반대되는 성향의 특징을 농담처럼 이야기하고 웃어넘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사람들 사이에 주눅 들어 있는 사람을 찌질하다고 말하는 대신 ‘E 사이에 낀 I’라고 불러주고, 비현실적 상상 속에 빠져 사는 친구에게 엉뚱하다고 말하는 대신 ‘S형들 사이의 N형’이라고 불러주지요. 저와 같은 T형들은 ‘선물은 포장보다 실속이지!’하며 서로를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MBTI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한마디 답변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자신을 바라보게 해주고, 나와 다른 타인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물꼬를 터준 것입니다.
MBTI는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이해하는 세상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MBTI는 사랑스럽게 봐줄 만한 도구입니다. 몇 가지 주의사항만 지키면 말이지요. 먼저 자신의 단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T형이니까 냉정한 말로 상처 줘도 이해해, 나는 P형이니까 원래 계획을 잘 못 짜. 이런 태도는 곤란합니다. 난 이렇게 태어났어,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라는 태도는 아집 있는 사람을 만들어냅니다. 함께 어울려 살 기회,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를 잃게 만들지요.
사람들은 극단적인 두 가지 타입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MBTI 해석의 치명적 단점이기도 한데요. 예를 들어, 외향성과 내향성을 구분한다고 해서 세상에 극단적 외향인과 극단적 내향인 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간 어딘가에 분포하고 있는 사람이 더 많지요. 하지만 MBTI에 과몰입하다 보니 자꾸만 극단적인 모습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E형이 평소보다 더 크게 소리를 낸다든지, N형이 지독한 헛소리를 늘어낸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뭐든지 과유불급입니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의 성격을 편향되게 강조합니다. 자신의 유형에 과몰입하여 실제 자신보다 더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특별함보다 기이함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지나친 아웃라이어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실제로 한 기관에 취업을 위해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인사 담당자가 인성 검사라며 가지고 온 것은 MBTI 검사지였지요. 제 검사 결과를 본 대표는 여러 번 고민했습니다. 제 성격 유형이 무난하지 않아서, 잘하면 정말 잘하겠지만 못하면 최악일 것 같아 고민이라는 겁니다. MBTI로 채용 여부를 결정하는 곳이라니, 먼저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때가 이미 십여 년 전이니, 지금은 얼마나 많은 곳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도구로 사용될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MBTI를 포함하여 모든 비진단 도구는 이해를 위한 도구입니다. 이해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과학적 방법, 통계가 중요합니다. 학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말이지요. 하지만 대중에게 심리학을 전하는 삶을 살면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그건 쓸모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거창한 이론도 비전공자가 이해할 수 없다면 소용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가닿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심리학의 목적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전문가에게 받는 진단은 낙인이 될까 두렵습니다. 진지하게 공부를 시작하기에는 부담스럽지요. 하지만 MBTI 같은 대중적인 유행이 때로는 그 길목으로 가는 시발점이 되어줍니다. MBTI는 성격 검사의 끝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마음에 대한 ‘무지’에서 ‘유식’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의 첫 번째 돌입니다. 돌 하나를 밟는다고 다리를 다 건넌 것은 아닙니다. MBTI 한 번으로 우리가 자신을, 서로를 완벽하게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MBTI에서 끝내지 맙시다. 여기서 만족하지 맙시다. 이제 나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관심이 생겼다면 그것을 토대로 함께 나아갑시다. 신뢰롭고 타당한 도구를 사용하는 전문가를 찾아갑시다. 이제는 과학적인 심리학을 들여다보고 우리 함께 공부합시다! 약은 약사에게! 마음은 심리학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