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된 행복이 거짓인 이유
그때는 타인의 삶을 자주 들여다봤습니다. SNS를 살피고 어떻게 지내는지 염탐하고 지인을 통해 소식을 묻기도 했습니다. 궁금해도 확인할 방법이 없으면 집요하게 검색해서 찾아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그 모든 게 귀찮습니다. SNS를 하긴 하지만 기록용입니다. 타인의 계정을 굳이 보지 않고, 우연히 보게 될 때나 다정한 인사를 남깁니다. 내가 관계에 너무 피상적으로 변했나? 무미건조해졌나? 인간미가 사라져버린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싫어진 건 아닙니다. 관계에 회의감이 든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만나면 반가운 시간을 보냅니다.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걸까요?
키가 크고 작고는 어느 정도 기준이 존재합니다. 180cm가 넘는 신장을 가진 친구가 농구선수 출신 서장훈 씨 옆에 있다고 작아지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굳이 옆 사람을 보지 않아도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키와 같이 객관적으로 정의하기엔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남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사회심리학자 페스팅거(Leon Festinger)가 제시한 사회 비교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는 능력이나 의견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상대와 비교합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며 부족함을 인지하기도 하고, 비슷한 사람을 보며 현실감을 찾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나보다 열등한 사람을 찾아 헤맵니다. 그래야 상대적으로 나를 나은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많고, 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깁니다.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닌데도 걱정하고, 별 상관없는 세상 속 인물들에게까지 마음을 씁니다. 그 관심사는 나쁜 소식일 때 심장을 더욱 뜨겁게 만듭니다. 자신보다 하찮은 타인을 통해 나를 올려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스Morse,와 거겐Gergen,은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미시간 대학 학생들을 불러다가 자신을 평가하는 설문지를 작성하도록 했는데요. 설문 도중 지원자로 위장한 공모자가 들어오는 설정이었지요.
공모자는 두 조건이었습니다. 한 조건의 공모자는 깔끔 씨(Mr.clean)로 닮고 싶은 외형을 가진 근사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른 조건의 공모자는 지저분 씨(Mr.dirty)로 꾀죄죄하고 멍청한 느낌을 풍겼습니다. 지원자들이 작성하는 설문지의 뒤편에는 자존감과 관련된 문항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모자(깔끔 씨/지저분 씨)를 만난 후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문항에 응답했지요.
결과는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기본적으로 자신을 우월하게 느낀 지원자는 공모자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는 사람이 깔끔하든 꾀죄죄하든 개의치 않은 것이지요. 하지만 자신을 열등하게 느낀 지원자는 공모자를 크게 의식했습니다. 먼저, 깔끔 씨를 만난 경우는 자존감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반면에 지저분 씨를 만난 이들은 오히려 높은 자존감을 드러냈습니다. 자기와 닮은, 혹은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보며 위안을 얻은 것입니다. 이로써 찌질이는 타인의 부족함을 통해 위로받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지요.
나는 어떤 여자애의 집에 책을 돌려주러 가려고 하면 그 애의 집에서 보기 싫은, 사소한 것들을 찾아냈다. 이가 빠진 접시, 낡은 가스레인지, 그런 것들을 발견하면 기뻤고 그 애들과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빈옷장, 아니 에르노, p.132>
아니 에르노의 소설 <빈 옷장>의 주인공 드니즈 르쉬르는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랍니다. 그녀는 유년 시절 동안은 노동자 부모를 둔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뭐든지 있는 부모의 상점에서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으니까요.
하지만 사립학교에 입학하면서 현실을 직면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볼 수 없던 상류사회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지요. 친구들의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일하지 않습니다. 상인처럼 지저분한 옷을 입지도 않지요. 그들은 드레스를 입고 오후 시간을 차나 마시며 우아하게 보냅니다. 이에 비하면 르쉬르의 집은 천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부모님을 혐오하기 시작합니다.
부모를 혐오한다고 그녀의 삶이 바뀌진 않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합니다. 친구 집에 갈 때마다 그 집에서 하자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소하지만 낡은 것들, 그 증거들을 보며 부유한 집 자식이라도 누추한 삶을 살고 있다고 애써 믿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위안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 위로일 뿐 그녀의 마음을 불행에서 자유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아델스Adelson가 소개한 체커 그림자 착시(checker shadow illusion)를 아시나요? 이 그림은 바닥이 체크무늬로 이루어져 있고 한쪽에 초록색 원기둥이 세워져 있습니다. 원기둥 때문에 바닥에는 그림자가 지는데요. 여기서 믿을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림자 없는 바닥의 어두운색 타일과 그림자가 있는 바닥의 밝은색 타일이 사실 같은 색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어두운 타일은 밝은 타일보다 짙게 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배경을 가리고 두 타일만 본다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정말 같은 색으로 보이는 겁니다. 색 캡처를 활용해 RGB 값을 확인해 봐도 120-120-120의 같은 색상입니다.
어두운색 타일은 밝은 타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따라서 어두운색 타일은 상대적으로 더 짙게 보입니다. 밝은색 타일은 어두운색 타일에 둘러싸여 있지요. 그러니 밝은색 타일은 상대적으로 더 밝게 인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착시를 닮았습니다. 평범한 나는 빛나는 사람 곁에서 우중충해 보이고, 꾀죄죄한 사람 곁에서는 화려해 보입니다. 나는 그냥 나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꾀죄죄한 사람 근처에 머무르려는 것이지요.
불행한 사람은 타인을 봅니다. <빈 옷장>속 르쉬르처럼 그들에게서 하자를 찾아냅니다. 상대의 밑바닥을 보고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렇게 나의 자존감을 지켜내려 합니다. 하지만 그 만족감은 결코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밝아지는 것은 일시적입니다. 절대적으로 밝아지려면 나 자신을 밝혀야 합니다. 검은색 곁에서 희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회색을 흰색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이 아닌 나 자신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자꾸만 관심이 생기던 타인을 보지 말고, 지금 나의 상황을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를 밝힐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해야 합니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을 밀어내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행복한 선택을 연습하다 보면 어느새 남들에게 관심이 없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너만 보인단 말이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어리석으리만치 시야가 좁아집니다. 세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서로에게만 집중합니다. 그 모습이 닭살이 돋아 눈썹이 찌푸려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눈엔 너만 보여! 이 세상엔 온통 너뿐이야. 이런 마음으로 내 행복에 집중하세요. 내 행복과 사랑에 빠지세요. 당신이 행복할 수 있다면 오늘 하루 팔불출이라도 봐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