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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방 Mar 16. 2023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리

<더 글로리> 동은의 복수의 숨겨진 의미

* 드라마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요즘 유행인 드라마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 피해자 동은의 잔인한 복수 이야기이다. 드라마의 끝자락에서 주동자 연진은 무리 중 한 명인 명오를 살해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동은은 그녀가 죗값을 치르도록 만든다. 연진이 감옥에 간 것은 통쾌하지만, 동은이 받은 괴롭힘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 복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동은이 무엇보다 잔인한 방식으로 그녀를 지옥에 보냈다는 걸 알 수 있다.


연진은 감옥으로 면회 온 동은을 여전히 조롱한다.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자신이 여기 오래 있을 것 같냐고 빈정거린다. 하지만 동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럴 것 같다고, 다 늙어서 나올 것 같다고 되받아친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억울해 하면서...’ 그 말을 들은 연진은 감정이 격해진다. 욕을 던지면서 내가 뭐가 억울하냐고, 뭐냐고, 자기가 모르는 게 뭐냐며 분노한다. 하지만 동은은 미소만 남길 뿐이다.


사실 연진은 명오를 다치게 했을 뿐 죽이지 않았다. 쓰러진 명오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연진은 감옥에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말을 연진에게 했다면 얼마나 약 올랐을까? 하지만 동은은 하지 않는다. 왜? 그것이야말로 제일 잔인한 복수니까. 알고 나면 모든 것이 간단해진다. 문제를 해결하거나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합리화하거나. 인간은 결국 답을 찾아내는 존재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힌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문제는 풀 수 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실이 남아있을 때 우리 마음은 발목을 잡힌다.


숨겨진 내막을 알지 못하는 연진, 하지만 무언가 있다는 숨겨져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연진은 그 무언가를 알고 싶어 평생을 괴로워할 것이다. 그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까지. 감옥에서 나오더라도. 그러니까 동은이 입을 열지 않는 이상, 그녀의 인생은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찾아 헤매는 끝나지 않는 지옥일 것이다.




청각 정보는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인지 영어시험 때마다 듣기 평가는 늘 골칫거리다. 한번 지나간 지문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놓친 문제는 발목을 잡는다. 그 문제를 신경 쓰느라 다음 문제의 지문을 놓치고 만다. 이런 일은 시험 장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러시아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은 사람들이 완결 짓지 못한 일을 완결한 이야기보다 더 잘 기억한다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 현상을 그의 이름을 붙여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부른다. 자이가르닉 효과 혹은 미완성 효과는 인생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알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그 상황에 더 몰입한다. 시간은 흘러도 마음은 그곳에 머문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의 유가족이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그렇다.


드라마에 중독되는 이유도 미완성 효과의 결과물이다. 드라마는 늘 가장 궁금한 순간에 막을 내린다. OTT가 활성화되면서 몰아보기가 가능해진 요즘, 한 시간만 보기로 한 자신과의 약속은 쉽게 무너진다. 나도 모르게 [다음 회로 넘어가기] 버튼을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참아내지 못한다.




사람들은 가끔 이런 고민을 던진다. 장기 연애를 끝마친 상대와 사랑해도 될까? 5년, 10년 사귀었다면 서로를 어떻게 잊겠느냐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장기 연애 후 이별한 사람들은 상대를 쉽게 잊는다. 그들의 이야기가 긴 시간에 걸쳐 결국엔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짧은 연애 후의 이별은 미련을 남긴다. 그들이 미처 만들지 못한 추억과 잘해주지 못한 기억을 완성하고 싶은 마음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과거라는 지옥에 머물러 살아간다. 마무리하지 못한 공백을 채우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공백을 채우려는 미련에 현재의 삶을 또 하나의 공백으로 남긴다. 그러니 현재를 사는 것, 그리고 후회 없이 오늘에 최선을 다해 완성하는 것만이 자신을 위한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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