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탈착식 신체기관, 플루트

심리상담사의 사생활

by 마음놀

이른 아침,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공복 유산소 운동인데, 그것은 플루트 연습이다. 건물의 홀 천장이 높고 울림이 좋아 소리가 아름답게 표현되어 연습할 맛이 난다.

작곡가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만 편애한다. 멋진 곡들은 대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곡이다. 반면에 그 밖의 악기들은 좀 슬퍼질 만큼 레퍼토리가 적다. 물론 피아노는 독보적인 사기성 악기이고, 바이올린은 이 세상 모든 악기 중에서 최고(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반박시 당신 말이 맞음)이기에 현실을 납득할 수밖에 없다.


맛있는 바이올린, 피아노 곡을 훔쳐먹어야만 하는 입장으로서 나는 플루트로 연주하기에 적합하도록 악보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거다. 몇가지 버전의 악보들을 잔뜩 뽑아서 마음에 드는 대로 오리고 붙이고 수정테이프로 일부를 지우고 네임펜으로 다른 멜로디를 그려넣다 보면 마치 연쇄살인마가 신문사에 보낸 성명서같은 몰골이 된다.


"매번 이렇게 오리고 붙이기 귀찮지 않으세요? 그리고 그림판이나 포토샵으로 하면 깔끔하잖아요?"

라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만 제 악보들은 연쇄살인마가 신문사에 보낸 성명서 같잖아요. 이 점이 좋은 거라고요."

라고 대답한다.


위 악보는 윌리엄 볼콤의 <우아한 유령> 래그 버젼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왕자님이 연주하신 이 영상을 보고 바이올린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바이올린은 이렇게 맛있는 걸 혼자 먹다니, 뺏어먹고 말 것이다!누덕누덕 기워서 완성했다. 얼마나 맛있는지 한번 감상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Ico2EmLXjj4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악기는 바이올린이지만(개인적인 의견, 반박시 당신 말이 맞음) 여전히 내가 연주하고 싶은 악기는 플루트이다. 관악기가 특별한 이유는 탈착이 가능한 신체 기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폐에 잠시 담았다가 내쉬는 길에 성대를 진동시켜 소리를 생성하는데 이 소리가 공명하여 목소리의 색과 톤이 사람마다 다채롭게 달라진다. 아랫입술에 플루트를 붙이면 진동 공명 조음 모두 플루트를 통하게 된다.


클라리넷, 색소폰, 트럼펫 등 입술과 입구가 직접 연결되는 관악기는 공기가 새지 않고 쓰이지만, 플루트는 공기의 일부만 소리에 쓰이고 일부는 공중으로 흩어버린다. 자원을 마구 낭비하는 것이다. 사치스럽고 철딱서니 없는 공주님 같다. 꼭 누구 같으냐면 내 친구 박유진 같다. 어느 날 박유진이랑 같이 뼈 해장국을 먹었는데 고기를 얼마나 대충 발라 먹는지 국물만 다시 채워서 팔아도 괜찮을 정도였다.


플루트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음악회에서였다. 플루티스트가 입은 연분홍 새틴 드레스에는 작은 큐빅들이 물결무늬로 새겨져 반짝였다. 플루트라는 악기가 얼마나 예쁜지 여성을 꾸미는 그 어떤 악세사리보다 아름답고 우아했다. 아! 그 소리는 음성같기도, 새 소리같기도, 부드러우면서 또한 거칠고 맑으면서 동시에 탁했다. 리셉션 자리에서 나는 플루트와 분리된 플루티스트가 그냥 평범한 아가씨처럼 보이는 것에 조금 실망했다.


그 옛날 내 또래 아이들은 무조건 피아노학원에 다녔다. 홍콩 야시장처럼 복작거리는 피아노 학원에서 아우성치는 아이들 소리와 뚱땅거리는 하농 체르니 소리에 뇌가 먹먹해질 때쯤에 한 놈씩 연습실에 끌려 들어가 고문을 당해야 했다.

피곤하고 지친 피아노 선생님의 멍한 눈빛, 연주라기보다 단순히 손가락을 놀리는 의미뿐인 행위, 바보 같은 사과 그리기, 이게 다 뭐냐. 피아노 책 속 하농, 체르니 초상화에 돼지코와 뿔을 그려놓은 걸(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었습니다) 엄마가 본 후에 피아노학원을 그만 다니게 되었다.


플루트를 가진 기간은 총 28년인데 그 중 연주한 기간은 5년이다.

6학년 때 방과 후 교실 과목에 플루트가 개설되어 1년간 다녔고 이듬해에 미국에 체류한 1년 동안에는 지역 청소년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다. 미국에서 내가 우월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미술시간과 악기연주시간이었다.


그리고는 20년 넘게 플루트를 열 일이 없이 숨 가쁘게 삶을 살아내던 어느날, 숨을 돌릴 때 문득

“다시 플루트를 연주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고, 우연한 기회로 아마추어 플루트 앙상블에 다니며 비로소 진지하고 여유있게 플루트와 관계맺게 되었다.

내 곁에 있는데도 보지 못하며 늘 그리워했던 플루트. 나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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