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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방 Aug 16. 2021

아이는 부모의 불안을 바라본다.

[예능]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 24화. 섭식장애와 자기 주도성


내 아이의 첫 딸기농장 견학 날


아이가 네 살 때 처음 어린이집에 갔다. 그리고 어린이집에 보내고 일주일 후 갑자기 파트타임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출근 시간에 맞추려면 일찍 집을 나서야 했기에 출근 날 하루는 어머님이 집에 일찍 오셔서 아이를 데리고 있다가 등원을 시켜주셨다.


어린이집 적응도 녹록지 않은데 나까지 출근을 하려니 아이가 괜찮을까, 싶으면서도 또 안 괜찮으면 어쩔 건가, 다 겪어야 하는 일이다 싶어 담담히 출근을 준비했었다. 아이한테 엄마 대신 할머니와 어린이집을 가고 다녀오면 엄마가 있을 거라는 설명을 자세히 해주고 아이도 심드렁히 뽀로로를 보며 응, 대답을 했다.


나의 첫 출근이 시작되었고, 엄마 갈게~ 해도 아이는 뽀로로에 푹 빠져 응~ 엄마 빠빠~ 하곤 말았다. 그렇게 순조롭게 두어 달쯤 출근을 하다가 아이가 처음으로 딸기농장 견학 가는 날이 되었다. 도시락을 단단히 싸 가방에 넣어주고 여느 때처럼 어머님과 바통터치를 하고 현관으로 갔다. 아이는 또 여느 때처럼, 아니 견학으로 좀 신나서 갔다 와~하며 인사하고 뽀로로를 보고 있었는데,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쪼그만 애가 도시락 가방을 메고 대형 버스를 타고 견학 간다는  마음이 왠지 짠하고 뭉클하고  가서 잘할 수 있을까 불안하고 그랬나 보다. 현관까지 갔던 내가 다시 들어가선 ‘ 다녀와. 선생님 말씀  듣고!’ 라며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다시 현관으로 갔는데, 티브이 잘 보던 아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울면서 엄마 가지 말라며 나를 붙잡는 것이다. 출근 후 두 달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안아주고 달래줘도 진정이 안 되어서 결국 어머님이 아이를 안고 계단까지 따라 나오셨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며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나름의 세계에 잘 적응하며, 또 다른 애착 대상인 할머니와  즐겁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나의 불안이 아이의 세계를 휘저어 놓은 꼴이었다.


다시는 아이 앞에서 내 불안을 비추지 말아야지. 아이의 불안만을 충분히 흡수해 주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줘야지. 엄마와 아빠가 일하는 것, 항상 네 옆에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가치중립적인 것임을 나부터 믿어야지. 내내 다짐하며 출근했던 기억이 난다.  그 딸기농장 사건은 지금까지도 멀티플레이어로 사는 나에게 중요한 사건이다. 아, 물론 아이는 딸기농장 넘나 잘 다녀왔다. 사진 보니 그렇게 즐거울 수 없다. 농부의 딸인 줄.




아이가 겪어낼 기회를 주는 것, 사랑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 24화에는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아이가 등장했다. 아이의 증상이 시기적으로 엄마의 복직과 맞물리긴 했지만, 엄마의 복직이 주원인이 아닌  아이의 높은 자기 주도성과 민감함이 여러 가지 복합적인 트리거와 맞물려 '질식 공포'로 대체(replacement) 된 것으로 보았다.


나는 이 프로에 나오는 부모님들이 기본적으로 엄청난 용기를 가진, 배우고자 하는 훌륭한 부모님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어도 그렇게 모든 것을 오픈하는 것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뿐만이 아니라 나도 변화하겠다는 결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이 상담, 특히 아이가 어릴수록 문제 형성에 가장 많은 지분은 부모와 양육 환경이라 부모의 양육은 어떤 식으로든 피드백을 받는다. 그게 부모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부모들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이다.


자신이 어떻게 해도 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 자녀 양육은 잘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덜 틀리려고 애쓰는 것이라는 것. 그 수치와 무기력을 부모가 감당해낼수록 아이는 자기 꼴대로 잘 성장해 나간다.


그런 면에서 오은영 박사님이 자신의 복직에 대해 너무나 미안해하는 엄마에게 건넨 피드백은 뼈아프지만, 핵심적이다.


아이가 상처 받도록 두는 것.

아이가 겪어야 할 것을 스스로 겪도록 하는 것.

그냥 그런 거라고 믿고 내보내는 것.


부모와의 안온한 세상에만 머물지 않도록

부모의 손으로 아이를 떠밀어 주는 것.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부모에게 또한

찢어지는 고통이고 아픔이지만

아이 앞에선 의연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아이를 위한 다음 단계의 사랑이다.


좋고 편한 것만 주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는데, 아픈 것도 내 손으로 주어야 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못해줘서 미안하고 좋은 것만 주며 웃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는데, 줄 수 있으면서도 삼켜야 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이런 게 사랑인 것을 알았다면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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