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케빈에 대하여
케빈은 대체 왜 그런 걸까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남편과 함께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봤다. 당시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내로라하는 평론가들과 심리학자들과 그 외에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리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의 리뷰 꼭지는 '사이코패스와 모성애가 상실된 엄마', '악마는 사랑 없이 길러졌다'와 같이 자극적이었다.
나 또한 기질과 양육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대체 케빈은 왜 그런 건지, 마음으로 저울질하며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영화가 끝나도 그것에 대한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기에 물음표만 수없이 남긴 채 영화를 껐던 것도 기억난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영화를 보는 나의 시선은 변해있었다. 대체 케빈이 왜 그런지, 엄마가 뭘 잘못한 것인지, 아니 대체 엄마가 잘못하긴 한 것인지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고 답을 구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케빈에게 다가가 묻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케빈의 엄마 에바에게도 그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네며 함께 앉아있으면 그만일 뿐, 대체 왜 그랬냐고, 케빈이 정말 이상한 것이 없었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내 삶의 어떤 시간이 영화를 보는 시선을 변화시켰는지 굳이 분석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저 우리는, 벌어질 일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존재일 뿐인데 말이다.
쳐다볼 수 있는 권리
영화가 시작되고 가장 눈에 띄었던 부분은 에바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에바를 피하지 않는 시선들이다. 길에서, 마트에서, 직장에서, 집 앞에서 사람들은 에바를 빤히 쳐다본다. 그 눈빛에서는 동정이나 경멸이나 애정이나 그 어떤 것도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들의 눈빛은 에바와 대화하거나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어떤 의도도 읽히지 않는다. 철저하게 에바는 대상화될 뿐이다. 그런 끔찍한 살인마의 엄마는 대체 어떤 사람이람. 그런 죄인은 관찰과 분석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는 듯한 그들의 눈빛은 에바에게 직접 날리는 주먹만큼 아프고 또 폭력적이다.
우리는 가끔 누군가를 관찰하고 궁금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궁금증과 관찰을 노골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대상은 대개 우리보다 약자들이다. 그리고 엄마인 나는, 내 아이에게 그것을 가장 많이 한다. 내 아이니까. 아이를 사랑하니까. 나에겐 아이를 잘 이해하고 키워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아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이를 관찰하고 아이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나의 사랑을 받는다고 나에게 대상화되는 것을 허락한 적은 없는데.
‘케빈에 대하여’는 옳은 제목일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영화의 원제와 한국판 제목의 차이가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이 영화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직역하자면 우리는 케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정도이다. 사실 이 제목에서도 케빈은 우리의 이야기의 대상이다. 하지만 적어도 케빈에 대해 혼자 판단하고 관찰하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이야기할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케빈은 한 가족의 잘못, 더 나아가 엄마라는 한 개인의 잘못된 양육으로 인한 악마가 아닌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낳았고 함께 책임져야 할 대상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제목이 한국으로 넘어오며 ‘케빈에 대하여’로 바뀐다. 물론 원제목을 직역하면 조금 어색한 한국어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에 오면서 케빈은 관객에게 관찰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이 영화는 ‘케빈’이라는 알 수 없는 인간에 대한 관찰기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케빈의 악행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를 낳은 엄마, 에바 또한 관찰의 대상이 된다. 마치 그 둘이 한 세트인 것처럼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이와 엄마는 종종 한 세트가 되어 관찰의 대상이 된다. 신문에 흉악범의 기사가 나오면 곧이어 그의 성장환경이 어떠했는지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기사가 나온다. 최근에 나온 가슴 아픈 아동 학대와 유기 사건들도 사건의 본질과 예방에 초점이 맞춰지기보다는 엄마란 사람이 대체 왜 그런지, 어떻게 그런 비정한 모성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관찰하고 수근 거린다. 모성은 쉽게 획일화되고 대상화된다. 아이를 가진 엄마라면 당연히 갖는 것이기에 흔하고 당연하며 필요에 따라 이상화 또는 평가절하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에 대한 존중이나 관심이나 경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엄마라는 대상이 된 엄마들은 아프고, 아픈 마음은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우리는 케빈과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나에게 영화 제목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원제목의 뒤에 ‘with KEVIN’을 붙이고 싶다.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케빈은 한 개인의 아픔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중요한 건, 케빈은 이야기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어야 한다. 케빈을 가운데 두고 쟨 왜 저럴까, 이런 것 때문에 저렇게 되었을 거야 수군거리는 것이 아니라, 케빈에게 물어야 한다. 넌 지금 어떤 기분이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네가 지금 가장 슬픈 건 뭐니. 뭐가 널 화나게 하니. 에바에게도 같은 질문이 던져져야 한다. 에바의 남편은 (정말 빡치게도) 에바에게 질문하지도 않고 심지어 관찰하지도 않는다. 성의 없이 조언하는 경우가 많다. 울어재끼는 아이를 퇴근 후에 안고선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흔들면 돼~’라고 말해버리면 그만이다. (내가 이 영화 전체에서 유일하게 썩소를 날린 장면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에바는 비로소 엄마가 된다. ‘케빈의’ 엄마가 된다. 마지막 장면, 케빈과의 면회에서 에바는 예전과 다른 표정으로 케빈에게 묻는다. ‘이제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지난 것 같아. 왜 그랬니?’ 엄마에게 처음 질문을 받은 케빈의 눈빛은 흔들린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케빈은 처음으로 진심을 말한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잘 모르겠어요.’ 케빈의 고백은 둘 사이의 애정 어린 첫 스킨십으로 이어진다. 케빈을 꽉 안는 에바의 등에서 멀고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아이에게 닿았다는 안도감, 이제 진짜 내가 너를 궁금해하고 네게 질문하고 너와 대화하는 ‘엄마’로 서 있겠다는 굳은 결심이 보인다. 그런 에바의 등을 보며 내내 긴장해 있던 내 어깨도 한결 내려간다.
누가 진짜 엄마일까. 많은 답이 존재하겠지만, 나는 아이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엄마 그리고 그 어떤 답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엄마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에게 되묻는다. 나는 진짜, 엄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