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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방 Sep 14. 2021

더 많은 쌍년서사의 탄생을 응원하며

[예능]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


이야기는 중요하다. 이야기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깊은 곳의 욕망을 반영하고,  욕망이 이야기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며 다시 인간은 현실에서 욕망을 실현할 동력을 얻게 된다.


그래서 누구의, 어떤 이야기가, 이야기 '되어 지는가' 권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있는 공간과 시간을 가질  있다는 것은   개인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욕망을 깨닫고,  욕망을 자신의 언어로 실현할 힘을 얻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상담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법을 알려주고, 해야  말을 함께 찾아주고, 마음껏 이야기할 장을 펼쳐주어 결국 내담자가 이야기할 힘을 주는 작업이다.)


벌써  10년도   인터뷰였던  같은데 누구였더라. 전도연인가, 손예진인가, 아무튼 캐스팅 걱정은 1 없을  같은 여성 배우들의 인터뷰에서  이리 작품에서 보기 어렵냐는 질문이었던  같다.


그때 그 배우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 일단 생각보다 나에게 들어오는 대본이 많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예쁘게 나오지 않아서, 혹은 주인공이 아니라서, 단가가  맞아서  나온다고 오해하기도 하는  같은데.


생각보다, 충무로의 대본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여성 캐릭터를 만나기가 어렵다.


나는 그저 도구적으로, 수단적으로 움직이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라 아무리 작더라도, 설령 망가지더라도, 살아  쉬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건 그냥 배우의 본능이다. "




누구의 대답인지도 모르는  인터뷰는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서 내담자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레퍼런스가 됐다.


. 남의 이야기를 연기하는  같은 배우들도,  남의 이야기 안에서도 결국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졌구나.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를 사는 내담자들은, 얼마나 자신의 이야기가 하고 싶을까. 그게 남들이 보기엔 조연이고, 망가져도, 얼마나 자신의 이야기에서 생생하고 싶을까. 심지어 자신의 이야기에선, 주연이 아닐  없는데 말이다.


자신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빼앗긴 목소리로 인해 내담자들은 얼마나 고통받고 있을까.





나는 내담자를 만날  사회문화적 맥락을 민감하게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또한, 그런 맥락들 특히 '이야기'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들어 많은 여성 서사가 등장하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다양한 맥락의 여성 서사가 등장하지만 결국은 어느  조각은 나의 이야기이고 때로는 내가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이고 때로는 닿고 싶지만 닿지 못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지상파의 무수한 아침 드라마와 일일드라마에 등장하는 착하고, 희생적이고, 모든 것을 인내하며 이해하는 여성

 '주인공' 캐릭터도, 모든 것에 어깃장 놓고, 비이성적으로 공격적이며, 악다구니를 쓰는  밖엔 전투력이 없는 이해할  없는 여성 '조연' 캐릭터들도 모두 하나같이  껍데기처럼 느껴진 것은, 그들 누구에게도 욕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욕망이 있을  자신의 목소리를   있다.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는 삶은 결코 주연이   없는 것이, 이야기의 이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온전한 선이나 악으로 분열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이며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안에서 자유롭게 변주하는 수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판을 흔들기 시작한 그때부터,  안의 이야기 또한 조금씩 자유를 얻은  같다.


<퀸스갬빗>, <워킹맘 다이어리>, <더 체어>가 그랬고, <런 온>, <WWW>, <하이에나>, <미스터 션샤인>,

<며느라기>, <윤희에게>, <미스티> 등이 그랬다.


물론  이야기들에도 분명한 한계점들이 있다. 하지만 욕망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관대하게 이들의 성장을 응원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나  영화에 비해 여성의 목소리가 현저히 더디게 나오는 곳이, 바로 예능인  같다. 사실 성인지 감수성이 가장 쉽게 어겨지기 쉬운  바로 예능판이 아닐까.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웃기기란 여간 힘든  아니고, 예능에선 '대상화' 유머의 코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대상화의 '대상' 대부분 약자 몰빵이고.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는 그래서 대부분 강자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남성이 대부분인 예능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여성이 많이 나오는 예능이 무언가 어색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얼마  무도 재방송을 보던 아이가,  근데 저긴 남자밖에 없네?라는데 정말   , 맞은  같아 얼른 채널을 돌렸다)


그런 맥락에서 <노는 언니>, <굿 > 같은 예능은 반갑다 못해 절로 리스펙하게 되는 프로그램이다.  단순히 여성 출연자들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의 힘으로 성취한 자신만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고, 누구보다  하고 싶고, 지고 싶지 않으며, 그로 인해 딸려오는 부와 명예를 얻고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세상이 정한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타고난 (대부분 여성성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이 재능이 되는 것을 생생히 보여준다.


여성은 욕망할 수 없다, 경쟁할 수 없다,

혹은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여적여) 등의 여성의 성취와 경쟁에 씌워진 수많은 프레임에 대해 여성도 똑같이 욕망하고 성취하고 누릴  있음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간 많은 남성 전문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여성 서사가 좌충우돌하면서 그린 거대한 강물은 드디어 우리를 <스트릿 우먼 파이터>라는 서사로 이끌었다.

      



'여성스러운 ' 뭔지 제대로 모르면서 여성은 파워가 딸려서, 혹은 선이 예뻐서, 노출이 많은 옷에 섹시한 선을 강조한 춤을 춘다는 어디서  지도 모른 편견을  3 만에 박살 내준 스우파.


방송에 출연할 만큼 짬되는 여성 크루가 8개나 된다는 사실에 먼저 놀라고. 이들이 남녀 가수를 막론하고  안무가 상당히 많고,  유명하다는데 놀라고. '여성스러운 '이라는 카테고리에 묶기엔 각자 구사하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에 놀라고.


무엇보다 '이기고 싶습니다' 아닌 '이겨야죠', ' 그랬어요' 아닌 '화나죠' '짜증 나요'라고 말할 . 화합이나 공감이 아닌 '전략적' 투표를 하고, 메인 댄서가 되어서도 팀원이 아닌 자신이 가장 돋보이는  무대를 구성하는데 주저함이 없을 . 자신의 댄스가 서브가 아닌 온전히 자신의 욕망에 의한 주인공인 몸으로 하는 이야기들을 만난다.


게다가, 좀처럼 팀으로 일할 기회 없는 상담자 입장에선,자신의 크루를 정말 목숨처럼 아끼고, 자신의 크루에 대한 자부심을 끝없이 드러내는 여성들의 단단한 팀웍이 부럽고  부럽다.



(아이키가, 워스트로 뽑힌 자신의 팀원을 위해 '죄송한데요. 저희 윤경이~'할 때 나만 운 거 아니죠...)



스우파는 아직 3회밖에 방영이  되었고 유교걸인  눈에 소화하기 어려운 의상들도 있고 악마의 엠넷이 어떤 악편을 할지 아직 모르지만 나는 이들이 성취하고 나아가고 쟁취하고 그러기 위해 경쟁하고 때로는 배신하는  거침없는 직선 서사를 사랑한다.


우리 안에 있는, 하지만 수천 년간 무시당한  건강한 욕망들이 때론 비열하게, 때론 거칠게,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에게 솔직하게 뿜어져 나오는  생생하게 살아움직이는 이야기의 에너지를 사랑한다.


오늘의 스우파가 나오기까지 때로는 돌을 맞으며, 때로는 주황 글씨를 새기며, 때로는 화형을 당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은 수많은 우리의 썅년들이 있었음을 안다.


 많은 쌍년 서사가 나오기를 응원하며 나는 오늘도, 무엇보다 나를 속이지 않는,  그리고 , 우리의 쌍년을 힘껏 응원한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간다.


쌍년은 어디든 간다.


우리, 함께 어디로든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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