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작년 이맘때쯤 나의 유일한 재미는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정주행 하는 것이었다.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의 찰진 연기와 '하지만 괜찮아'가 필요한 지금 이 시대에 딱 맞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게 인기의 요인이었던 것 같아.
문영이가 언제 갑옷 같은 옷들도 벗어던지고 짱돌 대신 대화와 타협을 배우게 될지, 무엇보다 부모와의 갈등과 화해를 어떻게 해낼지도 관전 포인트이지만 사실 내가 드라마를 보면서 눈에 많이 들어오는 커플은
강태, 상태 형제이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을 때 - 부모화된 아이의 슬픔
강태와 상태, 그리고 엄마의 이야기가 나오면 나올수록 사실 우리는 어느 쪽의 편도 들을 수 없게 된다.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호하느라 저마다의 방어기제를 힘껏 만들고 유지한다. 그러느라 생의 온 에너지를 써버린다.
주인공인 강태는 지긋지긋한 역할놀이를 하느라 항상 힘들다. 항상 형을 위해 사는 삶. 형에게 맞춰주는 삶.
화도 짜증도 슬픔도 모두 형을 위해 거두고 착하고, 하지만 건조한 사람으로 사는 삶. 나답지 않기에 한 번도 사람답지 않은 삶. 이게 강태의 삶이었다.
사실 이런 강태의 모습은 부모화(parentification)된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엄마의 남편이자 형의 보호자로 살아온 강태는 열등감과 우월감을 동시에 안고 살아간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부재하는 아빠, 형만을 위하는 엄마, 평생 아이로 살아가는 장애인 형. 그 모든 것이 강태가 강태 자신으로 어딘가에 머무르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리 어린 나이에 엄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겪고 나서도 형을 챙겨 야반도주할 만큼 강단 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 내가 이렇게 형을 위해 희생하며 참는다는 것, 내가 아니라면 이렇게 지독히 생계를 꾸리며 형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 온 세상에 형이 의지할 사람은 나 하나라는 것. 이 모든 것이 강태에게는 자신감이자 자부심이고 동시에 우월감이다. 다른 사람은 살지 못하는 삶을 나만이 짊어지고 있다는 우월감.
대체 가난하고 고된 삶이 어떻게 우월감이 될 수 있겠느냐 하겠지만 인간의 마음은 생각보다 굉장히 교묘하고 또 손해 보려 하지 않는다. 강태는 무엇을 지지대 삼아 지금껏 살아왔을까.
너는 나 없이 살 수 있을까
상담실에서는 의존하는 이와 의존의 대상이 된 조합을 쉽게 만난다. 의존의 종류는 강태와 상태처럼 아픈 가족이기도 하고, 혹은 다른 대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의존이기도 하다. 그 정도도 종류도 물론 굉장히 다양하다. 물론 높은 확률로 의존 대상이 된 사람들이 내담자로 온다. 이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어느 곳에 가든 자신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사람을 만나왔고 고통스러워했다. 대부분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상담실에 오신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고단한 삶과 상처에 정말 마음이 아프다. 이 삶을 어떻게 지탱해왔는지, 나라면 도저히 그렇게 못하겠어,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삶이다. 열심히 듣고 또 공감해드리면 그분들은 더더 마음을 열고 자신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더더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렇게 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이야기가 빙빙 돈다. 진척이 없다. 그러다 보면 내담자도 상담자도 집중력이 떨어진다. 왜지. 이렇게 할 얘기가 많은데?
" 나는 **하게 살고 싶은데, 나에게 의존하는 사람 때문에 그럴 수 없어요."
" ##님이 그 역할을 안 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 그건 안 돼요. 나 없으면 못 살거든요. 나 밖에 그걸 할 사람이 없거든요. 내가 그걸 안 하고 내 하고 싶은 대로 살면, 그러면 내가 너무 나쁜 사람이잖아요."
나 없이 사는 너, 없이 살 수 있을까
모든 관계에는 역할이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사람들은 비슷한 역할을 맡으며 산다. 특히 특정 관계에서 한 번 굳어진 역할은 쉽게 전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건강한 관계란 그 역할이 유연하게 조정될 수 있는 것, 한 사람이 그 역할을 너무 헌신적으로 하지 않는 삶이다. 이를테면, A라는 상황에선 내가 너의 보호자 역할을 좀 더 해줄 수 있지만 내가 보호받아야 할 B라는 상황이 있을 땐 둘 다 기꺼이 바통터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의 의존 대상으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생각보다 의존하는 자리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그가 더 이상 나를 의존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마음속 깊이에서 말이다.
의존의 대상이 된다는 것 생각보다 멋진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응원도 동정도 받을 수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절대적인 대상이 될 만큼 힘이 있는 사람임을 늘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동시에 나의 취약함은 점점 더 가릴 수 있다. 의존하는 사람은 귀찮지만 또 내 말을 잘 듣기 때문에 타인을 통제함으로써 느끼는 쾌감도 있다.
특히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의존의 대상이 됨으로써 쉽게 의존하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있고 그래서 적어도 외롭지 않게 된다. '심리적 궁합'이라는 게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의 레이더를 높이 세우고 나의 심리적 결핍을 채울 사람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적 이득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작동해서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의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자신이 계속 착취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 또한 상대를 통해 심리적 결핍에 계속 먹이를 제공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서 목이 마른데 바닷물을 먹는 것 같이
계속 목이 마르고 또 괴롭다. 의존하는 이가 나를 떠나면 나도 모르게 다시 다른 대상을 찾아 헤맨다. 나는 의존하는 너, 없인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젠 형의 자리를 돌려줄게
다시 드라마로 돌아오면, 강태는 문영이를 만나며 의존의 굴레에서 서서히 빠져나온다. 더 이상 형의 뒤에 숨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형에게 서운한 것도 화나는 것도 말하고 (비록 공평한 비율은 아니지만) 여느 형제처럼 주먹다짐도 해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형에게 형의 자리를 돌려주고 그래서 형이 성장할 수 있게 해 준다.
의존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그늘이 너무 큰 나무 같아서,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도무지 자라나지 못한다.
자신의 그늘에서 떠나 눈도 비도 폭풍도 맞겠지만 그래서 상처 받을 수 있지만 햇빛도 이슬도 바람도 맞게 보내주어야 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다.
강태가 상태에게 형의 자리를 내어주자 상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형 노릇, 어른 노릇을 한다. 그 역할은 문영이에게까지 확대된다.(고문영 작가님이 아닌 문영이로 불렀을 때의 쾌감이란) 이제 상태는 모자란 대로, 또 넘치는 대로 자신의 세계를 어른으로 살아갈 것이다. 강태의 손길이 필요한 순간도 있겠지만 그건 그저 가족으로서의 사랑이자 도움일 뿐이다.
의존의 대상은 의존하는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을 자유'를 허락해 주어야 한다. 나 없이 살 수 있는 너를 인정하는 것, 그래서 나와 함께 걸을 수 있는 너를 기대하는 것.
이상적으로는 아름다운데 상당히 아프고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하지만 성공하면 그땐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린다. 비로소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는 강태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