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마스크걸
그리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지만 가끔 디스토피아 물을 볼 때가 있다. 내게 디스토피아 물은 마치 모든 상황이 통제된 실험실 같다. 이것저것, 필요 없는 것은 다 통제하고 딱 하나만 변인으로 둔 다음 이게 통하나 안 통하나를 확인하는 그런 실험. 그러니까 말하자면, 디스토피아 물을 보면 인간에게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유일하게 필요한 하나가 무엇인지 아주 명료하게 보이는 느낌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이야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한 사람의 인생을 종과 횡으로 깊이 있게 따라가게 하는 이야기다.
모미의 어린 시절부터 마지막까지를 시간에 따라 횡으로 속도감 있게 따라가면서 동시에 모미가 지금의 모미가 되기까지 그의 내면에 있었던 이야기를 종으로 따라간다.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던 모미가 어떻게 죄수번호 1047이 되었는가. 모미를 강한 소용돌이로 이끌었던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모미를 이끈 건 '사랑받는다는 허상'이었다.
춤추고 사람들에게 박수받는 걸 좋아하는 건 대부분의 어린이에게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애정과 관심과 칭찬은 무대에서 내려와 조명이 꺼지면 흩어진다. 어린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땅에 단단하게 뿌리내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현실 밀착형 애정과 관심과 칭찬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모미의 엄마는 모미에게 최소한의 감정도 섞지 않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메마름에 모미는 점점 안으로 숨으면서 사랑받는다는 것에 대한 허상을 키운다. 사랑을 받으면, 관심을 받으면 난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행복해질 거야.
이렇게 자라난 모미는 그래서, 자신의 모든 '괜찮음'을 타인의 손에 맡긴다. 회사라는 현실에선 박기훈이었고 온라인에선 별풍선과 댓글들이었다. 박기훈도 별풍선도 댓글도, 그러나, 모두 모미의 현실이 아니었다.
마스크걸에서는 대칭성이 자주 등장한다. 모미와 미모, 춘애와 예춘같은 이름도 그렇고 모미와 춘애가 부용을 죽이는 장면이나 둘이 토요일 밤에를 부르던 장면까지.
하지만 마스크걸에서 최고의 대칭성은 주오남과 모미가 아닐까 싶다.
두 사람 다 사랑받는다는 것에 허상, 정확히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것에 자신의 모든 괜찮음이 있을 거란 허상이 있었고 그 뿌리에는 어떤 식으로든 메말랐던 엄마와 그나마도 부재해던 아빠가 있다.
모미의 박기훈과 온라인 방송이 주오남에게는 애니와 리얼돌과 마스크걸 방송이었다.
그리고 허상이기에 나를 헤치지 않고 사랑을 줄 거라는 잘못되었지만 간절한 허상이 그들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파멸로 이끌었다.
모미가 박기훈에게, 온라인 댓글과 별풍선에, 그리고 마지막에는 잠깐이지만 주오남에게 자신의 구원이 있다고 믿었을 때 모미는 늘 우울하고 행복하지 않다.
그러나 그런 모미가 타인에게서 구원은 올 수 없음을 깨닫자 스스로 구원을 선물하기 위해 애쓴다. 교도소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무리에게 지치지도 않고 달려가는 모미의 눈빛과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그 장면을 나는 이 드라마의 최고 장면으로 꼽고 싶다.
누군가 나를 사랑해 주고, 예뻐해 주기 바라며 늘 선택당하기 위해 애쓰던 그 틀을 탁, 하고 벗어났을 때.
사랑받는다는 것의 허상을 인식한 이가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때 온전히 느끼는 자유의 쾌감을 경험한 모미는 그래서 마지막, 자신이 진짜 지키고 싶고 사랑을 주고 싶은 대상인 딸 미모를 위해 위험을 감행하고 목숨을 버릴 수 있다. (웹툰에서는 계속 미모를 맴도는 슈퍼히어로가 된다)
난 마스크걸이 디스토피아 물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인간다움도 양심도 상실한 시대에 그래서 결국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극단적인 형태로 묻고 있는 이 작품에서 마스크걸, 모미는 말한다.
인간의 진짜 자유는 사랑받는다는 것의 허상에서 탈출할 때만 가능하다고. 그래야 진짜 나를 지키고, 내가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모미의 이 사랑을 미모가 받았을까.
드라마의 마지막, '저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게 꿈이에요'라고 말하는 어린 모미의 모습을 보는 미모를 보면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모미가 그렇게 원하던, 땅에 뿌리박혀 흔들림 없는 진짜 사랑을 미모는 드디어 받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