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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Nov 05. 2023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윤지영 <달을보듯이보기>

 


윤지영 <달을보듯이보기>, 2분 45초, 단채널 비디오, 퍼포먼스, 2013-2014



2022년 여름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시립미술관 소장품 교류전<우리가 마주한 찰나>에서 만난 윤지영 작가의 미디어작품이다. 영상의 주인공인 작가는 사다리 위에 올라가서 철봉에 매달릴 준비를 하고 있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천장에 묶여 있다. 그녀가 철봉을 손으로 잡자마자 아래에 있던 남자가 사다리를 치워버린다. 그녀는 철봉에 매달린채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그녀가 손을 놓기라도 하면, 철봉에 묶인 머리카락이 두피는 찢어낼지도 모른다. 양옆에 있는 두명의 사람이 이런 위험에 처한 그녀를 돕기 위해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한번에 쉽게 잘리지 않아서 지켜보는 이의 마음이 졸여진다. 주인공은 안간힘을 쓰며 버텼고 결국 머리카락이 잘린다. 


그녀는 철봉 아래 자신이 착지할 바닦을 쳐다본다. 쳐다보는 몇초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살았다는 안도일까? 제대로 착지 하기 위한 숨고르기 였을까? 한참을 쳐다본 후 그녀가 아래로 떨어지고, '빠직' 하고 무언가 깨어져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떠나고 난 자리에는 조각난 거북이의 등껍질이 놓여져 있었다. 





달을 보듯이 보기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작가는 이 영상에 <달을보듯이보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달을 보듯이 보기. 우리는 달의 한쪽 면만 본다. 달의 보이는 면만 보듯이 영상에서도 보이는 그대로 만을 보라는 뜻일까? 아니면 달의 한쪽 면만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뒷면의 존재를 인식(성찰)하라는 뜻이었을까? 우리는 달에 가 닿을 수 없는 상태에서 본다는 한계를 말하는 것일까?


작가는 이 영상에 대해 잘린 머리카락과 부서진 거북이 등껍질은 누군가의 생존을 위해 치룬 누군가의 희생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희생되어진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사고 실험이었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살기 위해 머리카락을 희생시켰지지만 생존한 주인공은 거북이를 희생시킨다. 일부러 그런것이 아니란 것을 안다. 생존하기 위해 불가피했던것을 안다. 그러나 거북이는 희생되었다.


부서진 거북이 등껍질을 보면 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내 생존을 지키기 위해 내가 먹는 먹는 고기는 어떤 방식으로 길러지고 도축되어 내게 왔을지, 내가 마시는 커피는 어떤 노동력의 대가로 내게 왔을 지, 내가 타는 지하철의 전기는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어 내게 온 것일지 생각하게 된다. 정당하게 돈이라는 대가를 지불했지만 과연 그것이 정당한 소비였을까 하는 물음부터, 과연 내가 정당하게 살 수 있는것은 대체 어떤것일까? 라는 회의스런 물음까지 던지게 된다. 나를 살리는 그것들이 내게 오기까지 무엇을 파괴하였을지, 무엇을 희생하였을까?


이렇게 신체적 생존을 위한 희생 말고 좀더 은밀히 일어나는 일들도 있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일어나는 희생들이 있다. 육아를 위해 어머니의 시간이 희생되고, 밥벌이를 위해 아버지의 욕망이 희생되고, 학생답게 살기 위해 행복이 희생된다. 사회적 규범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한 사람의 개인성을 희생시킨다. 편하고 익숙한 거짓앞에 불편하고 낯선 진실이 희생된다.


심리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친밀한 관계에서 자행되는 희생들이 있다. 내 감정의 해소를 위해 엉뚱한 사람의 감정의 희생되고, 내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이의 욕구가 희생되고, 내가 의존하기 위해 누군가의 독립성이 희생된다.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 그를 돕기 위해 잘려나간 머리카락, 안도하고 바닦에 떨어졌으나 거북이를 밟고 착지한 사람. 이 모든것은 우리 삶의 모습이다. 달의 뒷면이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것이 아니다. 보지 못해도 존재하는 것이며, 볼 수 없어도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밝음이 있다면 그 밝음으로 생기는 어둠이 존재한다. 


달을보듯이보기. 나에게 '달'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이며 '본다'는 것은 밝음과 어둠을 다 가잔 전체적 존재이로 바라본다는 것이이다. 하지만 웬지 달처럼 멀리 있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만질 수 없는 달을 보듯 세상을 멀리서 관조하고 있는 내 위치 때문일까. 비겁함과 동시에 더 다가서고 싶은 조급함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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