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전시가 종료된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은 많은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조각인지 노숙자인지 헷갈리는 작품이 놓여 있고, 작가를 닮은 조각이 침입자처럼 미술과 바닥을 뚫고 나온다. 벽에는 미술작품이라고 하며 바나나가 붙어져 있고, 미술관 실내에는 자전거 탄 소년이 관람객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
카텔란은 미술 제도권, 정치권, 종교계에 대한 풍자, 동물의 의인화, 유명인들을 희화화한 작품들을 선보인 탓에 '익살꾼', '말썽꾼', '어릿광대'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카텔란은 “때로는 대중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자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어야 중대한 문제들에 이목을 집중시킬 수가 있다”라고 말하며 그의 자극적인 표현은 꼭 직면시켜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그가 관객들에게 직면시키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연극 무대와 같은 공간에 등장하는 카텔란의 자화상들
전시장은 연극의 무대처럼 보인다. 여느 미술관처럼 액자나 조각의 받침대가 없으며 작품 보호를 위한 차단봉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비교적 자유롭게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심지어는 미술관 바닥은 작품 설치를 위해 구멍을 내기도 했다. 전시실에는 여기저기 카텔란이 나온다. 변신술을 하는 마술사처럼 의외의 장소에서 카렐렌이 등장한다.
<무제>, 2001
위 작품에서는 카텔란이 바닥을 뚫고 나왔다. 미술관에 침입한 것일까? 잠입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요란스럽고 그렇다고 점령하러 왔다고 하기에는 은밀하다. 카텔란은 어딘가로부터 탈출한 것일까? 아니면 질서 정연하고 정적인 미술관을 놀이터로 만들러 온 것일까? 미술관에서 만들어 놓은 출입구가 아닌 바닥을 뚫고 들어온 모습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카텔란이 미술계에 입성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바닥에서 나온 카텔란을 보며 이제 제대로 쇼가 시작되었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자, 이제 놀아 볼까?"
전시장에서는 흥미로운 오락거리로 가득하다.
<무제>, 2000 (좌) 카텔란 <우리가 혁명이다> 2000 / (우) 요셉 보이스 <펠트양복> 1970
바닦을 뚫고 나온 카텔란이 이제는 벽 고리에 걸려 있다. 이 작품은 요셉 보이스(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행해지는 퍼포먼스인 '사회적 조각'의 창시자이며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 행위예술가)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카텔란의 <우리가 혁명이다>에서는 요셉보이스의 회색 양복을 비슷하게 차려입음으로써 요셉 보이스로 부터 받은 영향이 크게 있었음을 표현하였다.
이번 전시된 <무제>에서는 요셉 보이스의 옷은 벗었지만 여전히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면 <우리가 혁명이다>와는 다르게 미술관 벽면에 고정되어 있다. 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전시하여 보여주고 평가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벽에 걸린 카텔란은 구속된 현 상태를 받아들이며 그대로의 자신을 전시하고 있다.
(좌) 북치는 소년 / (우)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 책 표지
전시 관람 중 갑자기 북소리가 들린다. 전시장 구조물 위에 한 소년이 북을 치고 있다. 독일의 소설 <양철북>에 나오는 주인공 오스카를 연상시킨다. 오스카는 고의적으로 사다리에서 떨어진 후 성장이 멈춰진채 작은 아이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나치가 무언가 권력을 휘두를 때마다 양철북을 두들기며 광대처럼 행동하곤 한다. 미술관에서 만난 북 치는 소년은 무엇을 방해하고 싶었던 것일까? 미술관은 엄숙하고 진지한 곳이라는 편견, 조용히 관람해야 한다는 특유의 매너, 더 나아가 그리고 그러한 매너를 형성한 미술관의 권위를 훼방 놓고 싶어 했던 것일까? 관람객은 이 의외의 상황에 놀라면서도 재미를 느낀다. 북 치는 소년은 카텔란의 또 다른 분신이다.
산만함으로 집중시키기 : 정신분산 - 온몸으로 겪기 - 정신집중
이렇게 카텔란의 만들어놓은 미술관 속 연극 무대를 거닐다 보면 카텔란이 만든 놀이터에서 같이 노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관람객들은 사진을 찍으며 작은 퍼포먼스들이 일어날 때마다 웃음을 짓고, 혐오스러운 장면을 만날 때면 깜짝 놀라 한발 뒤로 물러서기도 한다. 어찌 보면 정신산만한 오락거리 가득하다.
이 전시장에는 유독 힙합 옷차림을 하고 사진을 찍기 바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작품을 즐기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미술을 관람하는 자신을 보여주고 싶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전시이기도 하다. 전시를 관람하며 예술작품에 감정이입한다는 전시 본래의 목적 보다도 미술관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촬영하고 타인과 공유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전시장의 미술작품은 관람자의 모습과 함께 복제되고 SNS로 확대 재생산된다.
관람자의 이러한 미술감상 태도는 작가의 작품 제작 방식의 연장이기도 하다. 카텔란의 작품은 패러디 작품들이 많다. 다른 작가의 예술을 패러디하기도 하고 자신의 작품을 다시 패러디 하기도 한다. 그리고 작품 제작도 작가가 직접 하지 않는다. 자신이 기획서를 쓰면 그 기획서에 맞게 주문생산된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누군가의 손을 빌어 새롭게 창작되는 것이다.
카텔란은 단순한 모사나 복제가 아닌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 카텔란의 작품을 보며 무엇을 패러디한 것이지? 무엇을 의도한 것이지?라는 의문을 갖게 하고 전시장에 연출된 의외의 상황과 만나면서 관객의 마음은 동요된다. 카텔란은 관객의 마음을 어지러이 흔들어 놓음으로써 자신의 작품에 집중하게 했다. 자극적인 장면들로 충격을 주며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코메디언> 2019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정신분산'과 '정신집중'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신집중'은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에 빠져 드는 것이다. 중국의 한 예술가가 자기가 완성한 그림이 실제 같아서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의 일화처럼 그림 속으로 자신이 들어가는 감정이다. 반대로 '정신분산'은 예술작품이 자기 속으로 빠져 들어오게 한다. 작품에 감정이입되지 않고 감상자의 주관적 기분에 따라 즐기기도 하고 거부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분산은 건축물을 감상하듯이 시각과 촉각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건축물을 파악할때는 시각뿐 아니라 촉각적 경험을 하면서 건물 전체를 지각하는 것 처럼 예술작품도 시각과 함께 '촉각적 수용'을 통해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촉각적 수용은 온 몸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건축물을 돌아다니면서 건물의 위치, 용도 등을 파악해 나가듯이 몸으로 감각하는 것이다. '정신분산'을 통해 몸으로 경험된 것이 익숙해 지면 그제야 건축물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런식으로 '촉각적 수용'은, 온 몸으로 체험된 감각을 통해 예술작품(건축물, 대상, 너..)에 정신집중하는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카텔란은 전시는 체험적이다. 관객은 그가 만들어 놓은 무대에 한 명의 배우로 참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시각적으로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카텔란의 해학에 공감하여 같이 웃게 만들고, 그가 조롱한 세상을 같이 조롱하고, 관객 역시 기꺼이 하나의 조롱거리가 된다. 그렇게 온몸으로 카텔란의 작품을 체험하게 된다.
카텔란이 직면시키고자 한 것은 바로 삶
정신산란하게 오락거리고 심취하게 하고 신체적 체험을 하며 말랑해진 몸은 마지막 전시실에서 만나야 할 것을 만나게 된다. 앞서 체험한 예술적 경험을 '정신집중'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장면과 마주하게 된다. 바닥에 놓여진 <모두>는 9개의 설치물이다. 이 조각들은 뒤틀린 채 굳어진 몸을 표현고 있다. 작년에 있었던 10.29 참사 현장의 고통과 참담함이 소환된다. 이 전시장은 참사가 있었던 곳과 불과 지하철 1개 정류장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전시실에는 생과 사가 한 공간에 어지럽게 얽혀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모두'이다. 우리가 아닌 모두이다. '우리', '너희' '그들'을 모두 포함한 '모두'이다. 이는 모두의 일이며 모두의 비극이며 모두의 고통이다.
<모두>, 2007
이 비극이 '모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품에 감정이입해야 한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감정 이입을 위해서는 먼저 벤야민이 말한 '정신분산'적으로 바라본다. 우선 작품을 내 속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다. 바닦에 놓여진 작품 주변을 조심히 걸어보자. 그들이 걸었을 이 거리를 걸어보자. 누워있는 한 사람 한사람을 떠올려 보자. 몇살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하얀 이불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의 자세를 상상해보고 그 비틀어진 자세속에서 느꼈을 고통과 공포를 떠올려 보자. 내 몸에 고통과 공포가 느껴지는 그 순간 신체는 고통에 전율하게 된다. 내게 들어온 작품의 정서가 바로 내 눈 앞에 펼쳐진 작품의 정서이다. 이렇게 공감이 이루어 진다. 너의 이야기를 내 눈과 귀로, 내 가슴으로 들어주려고 할때 공감이 이루어 진다. 너의 고통이 내 마음으로 들어올 때 나의 마음은 무거워진다. 그렇게 작품 속 감정과 하나가 된다. 작품에 보다 '정신집중'하게 되고 그때의 사건과 비극에 감정이입하게 된다. 그렇게 작품을 온몸으로 기억하게 된다.
카텔란이 관객에게 집중시키고자 한 것은 이런 우리의 이야기 아닐까? 제도, 관습, 정치, 종교를 넘어선 우리의 삶, 사람이 죽고 사는이야기 말이다. 웃음과 행복 이면의 눈물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도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을 들어주길 바란 것 아닐까. 그러나 슬픔에 잠식되지 않게, 그 무거움에 짓눌리지 않게. 서로가 찐득하게 의존하지는 않지만 담담히 의지하고 있는 <숨>의 두 존재처럼. 서로 들어주기. 함께 머물러 주기. 그렇게 모두가 되기.
<숨> 2001
Exhibition Details
마우리치오 카텔란 : We
2023. 01. 31 - 2023. 07. 16 (전시종료)
리움미술관 (서울 용산구)
www.leeumho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