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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Dec 16. 2023

여기에 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이강승 <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보살피게 될까>


'돌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흔하게는 '어른이 아이를 돌보다', '간호사가 환자를 돌보다.'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일상에서 '돌보다'라는 표현을 쓸 때는 강자가 약자를 돕거나 건강한 사람이 병이 있는 보살필 때 사용하곤 한다. '돌보다'의 사전적 정의는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다'라는 뜻이다. '관심'은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며 '보살피다'는 정성을 기울여 살피는 일이다. '돌보다'는 단순한 도움과는 다르다. 정성을 기울여 상대에게 주의를 집중하고 상대의 필요를 두루 살피는 것이 '돌보다'의 행위이다.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이강승'작가의 <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보살피게 될까>는 바로 '돌보다'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퀴어들의 자료들을 수집하여 재구성한 후 미술사의 장면으로 보여준다. 전시의 제목인 <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보살피게 될까>는  미국의 시인 파멜라 스니드(b. 1964)가 에이즈로 투병하는 자신들의 동료를 누가 돌보게 될지 질문을 던지며 쓴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퀴어들의 흔적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돌봄의 관계로 연결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는 나와는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관계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현재 - 그들이 있다.


(좌) 이강승, <무제(변희수 & 김기홍)>, 2021, 종이에 흑연 / (우) 이강승 <홍석천>, 2020


전시장 입구 전면에는 김기홍 인권운동가와 변희수 하사의 얼굴 그리고 배우 홍석천의 신문기사가 나란히 걸려있다.  2000년대 초반 배우 홍석천의 커밍아웃으로 성소수자 문제가 전면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뒤 두 명의 트랜스젠더가 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20년의 시간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그리고 20년 전, 그보다 훨씬 전에는 또 무엇이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2000년 초반 홍석천 배우가 커밍아웃을 했을 당시에는 놀라웠다. 유명 연애인이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도 퀴어에 대한 노출이 많지 않았다. 대학교 때 본 <아비정전>이 유일했다. 당시 영화를 볼 때도 낯설었다. 거부감보다는 놀라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이상은 생각하지 못했다. 홍석천 배우의 커밍아웃 이후로 유명인들의 커밍아웃이 계속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노출이 늘어날수록 사회전반에 인권에 대한 의식은 향상되었다. 나 역시도 정체성을 이유로 받는 차별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변희수 하사의 사건을 뉴스로 접하면서 그저 안타까움에 그쳤다. 변희수 하사의 고통을 깊게 고민해 보지 않았다. 김기홍 인권운동가는 더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퀴어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상은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일종의 무관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는 극중 인물인 영배가 의도치 않게 커밍아웃을 하게 된다. 함께 있던 친구들은 모두 이해한다는 듯 말하지만 극 중 영배는 말한다. "내가 민수 데리고 왔으면 너넨 분명히 잘해줬을 거야. 하지만 민수는 너네 눈빛에 상처받았겠지" 겉으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막상 괜찮지 않은 것이 성소수자의 문제인 것 같다. 조심스러워진다. 그 조심스러움에 더 알려는 노력이 두렵기도 하다.



이강승, 라자로(정다은, 네이슨 머큐리 킴과의 협업) 2023, 단채널 4K 비디오


영상 <라자로>에서는 두 명의 무용수는 하나로 만들어진 셔츠를 입고 춤을 춘다. 그 둘은 하나이지도 그렇다고 둘이 되지도 못한다. 그들은 서로를 떠나 해도 떠날수가 없다. 흔한 이성애의 관계라고 생각하면 이들의 몸짓은 애절하게 아름답다. 하지만 이 두 남성의 섬세한 접촉이 묘하게 거북하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싶지만 감정적으로는 아직 어렵다. 그래서 자꾸 과잉해석을 하게 된다. 아름다움을 과장하고 싶어지기도 하고 별 의미가 아닌 것으로 축소해버리고 싶기도 하다. 또는 그저 모든 감정을 차단한 채 그저 피사체로만 바라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과거 - 그들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검은색 제본을 한 책이 여러 권 놓여 있다. 그 책 안에는 퀴어물로 불리는 미디어 잡지, 신문 기사, 포스터, 논문 등을 모아두었다.  홍석천 배우가 커밍아웃을 하기 훨씬 더 이전부터 그들은 있어 왔다. 퀴어 잡지 <Buddy>가 1998년에 창간되었고 그 이전에도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는 커뮤니티가 있어 왔다.  꽤 긴 시간 퀴어들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를 돌보고 자신을 드러내는 활동을 쭈욱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전시를 보는 내내 마치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어 집주인의 은밀한 사생활이 담긴 일기장을 열어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일기장은 이제 몰래 돌려보던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 미술사의 일부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실에 펼쳐져있다.



이강승, <무제(오준수의 편지)>, 2018, 종이에 흑연, 160X120cm


오준수의 편지가 확대되어 드로잉되어 있다. 오준수는 1993년 자신이 HIV 양성임을 공개하고 사망 전까지 남성 동성애 인권단체인 '친구사이'에서 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오준수의 편지에서는 잊히는 것을 두려워했던 그의 여린 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오준수의 편지를 읽으며 나와 그 사이의 공통분모를 찾게 되었다. 우린 누구나 혼자만 아는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은 상처와 관련된 것이다. 그 비밀은 비단 퀴어들만이 가지고 있는 비밀은 아니다. 우린 모두 폭력과 관련된 상처가 있다. 권력으로 부터 받은 물리적, 언어적, 비언어적 상처가 있다. 자신을 드러냈을 때 무참히 깍여져 버리는 경험이 있다. 혹은 이것이 두려워서 억압해 둔 것들이 있다. 많은 이들이 아프다고 말해보았지만 제대로 들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에 휘둘리지만 억지웃음을 지으며 마음을 감춘다. 홀로 있는 밤이 외롭고 무섭지만 선뜻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지 못한다. 약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렵다. 약한 것은 나쁜 것이라 교육받았다. 나약한 것은 도태된다고 교육받았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남들만 틈은 살아야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모두들 안간힘을 쓰고 살아간다. 상처가 시뻘겋게 터져 있는대도 고통을 감추며 살아간다. 모두 아프지만 아무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다.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가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성복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전시된 작품들은 퀴어들의 드러난 흔적이다. 아니 드러낸 흔적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낸 흔적이다. 사랑하기 위해 드러낸 흔적이다. 사랑으로 연대하기 위해 "나 여기 있어"라고 외치는 흔적이다. "난 사랑하고 싶어."라고 외치는 흔적이다.




미래 - 이미 함께


이강승 & 베아트리스 코르테즈 <미래완료>, 2020, 혼합매체


과거의 흔적들과 현재의 작업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미래완료>는 흰색 버튼을 누르면 미래에서 온 편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든 장치이다. 이강승과 베아트리스 코르테츠는 세계 각국의 친구들에게 퀴어의 미래와 관련된 문장을 보내달라고 말한다. 작가들은 '퀴어'의 의미를 성별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문제뿐 아니라 아직 정의되지 않는 것에 공간을 열어주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라고 설명한다. 이 요청을 받은 친구들의 답장이 영수증처럼 보이는 메모지에 인쇄가 되어 현재에 도착한다.   

 

"미래가 오면, 우리는 이미 두려움 없는 사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두려움 없이 사랑하기 위해 미래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 한 발씩 걸으며 미래로 가고 있다. 김기홍 활동가는 생전에 "더 많은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낸다"라고 했다. 목숨을 걸고 드러냈다. 이들이 자신을 드러냈기에 다른 이들과 연대하여 사랑을 확장할 수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퀴어들은 사랑하기 위해 상처를 드러낸다.  존재를 드러낼수록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두려움 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춤을 추고 있다. 이들의 현재는 바라마지않는 미래로 향해가고 있다. 과거의 흔적을 기억하는 동시에 욕망하는 미래를 향하여 지금 여기서 춤을 추며 가고 있다.


"미래가 오면, 우리는 이미 그 춤을 기억할 것이다." 


오늘만큼은 이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 있다는 기분이 든다.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공간에 머물렀다. 우린 아직 서로에게 '타인'이지만 이들과 나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보게 된다. 왜 거리가 생겼는지, 이 거리는 정당한지, 이 거리는 움직여 질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러한 고민도 작은 흔적으로 남겨본다.





Exhibition Details

올해의 작가상 2023

2023. 10. 20 - 2024. 03. 3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www.mmc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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