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림, 그리움음 '긁다'의 어원에서 파생되어 나왔다고 한다. 종이가 생겨나기 전에 동물 뼈나 거북이 등껍질에 뾰족한 것으로 새기면서 글과 그림을 긁었다. 그래서 문자로 긁은 것은 글, 형상을 긁은 것은 그림, 마음을 긁은 것은 그리움이라고 부른다.
김환기의 '점'은 온통 그리움이다. 그가 붓으로 긁은 것, 붓으로 새긴 것, 물감으로 물들인 것은 온통 그리움들이다. 마음에 새겨진, 물든, 긁힌 그리움이 그림이 되었다.
하늘에 담은 그리움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970년, 캔버스에 오일, 개인소장
김환기는 이미 한국에서 성공한 화가였으며 홍익대 교수, 미술협회 이사 등 미술계의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로써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 세계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파리로 그리고 뉴욕으로 향했다. 김환기는 여러 가지 추상 기법을 개발하고 시도하던 끝에 '점'을 만나게 된다. 작가는 유화 물감을 터펜틴이라는 기름을 섞어서 묽게 사용했다. 캔버스는 코튼 덕(Cotton Duck)이라는 두꺼운 면 캔버스 재질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아교 용액을 얇게 펴 발랐다. 묽은 유화 물감을 캔버스에 바르면 면천 자체에 흡수되는 동시에 아교층을 따라 번져 나가면서 마치 수묵화 같은 묘하고 은은한 느낌을 준다. 점화는 여러 번의 붓질을 반복하며 만들어진다. 우선 점을 찍은 후 그 점을 사각형으로 가둔다. 그리고 이미 찍어 놓은 점 위에 반복해서 점을 찍는다. 작가는 하루에도 10-15시간 동안 점을 찍는 중노동을 했으며 이 작업으로 허리에 문제가 생길 정도였고 한다. 그는 점을 찍으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는 어떻게 이 노동을 감수할 수 있었을까?
위 작품의 제목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시구와 같다. 김광섭 시인은 김환기에게 연하장과 자신의 시가 실린 문집을 보냈고, 김환기는 친구의 시에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려 나간다.
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 시는 만남과 이별을 경험한 누구에게나, 마음에 남겨진 그리움이 있는 이라면 공감할 법한 내용이다.
다음은 화가가 일기에 남긴 글이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江山)…"
- 김환기의 일기에서
화가는 커다란 벽면을 채우는 그림의 점만큼 그리운 것들이 많았나 보다. 그가 사랑했을 사람들, 그가 사랑했을 자연을 따라 내 마음도 들여다본다. 내가 사랑한 것들,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그리움을 더듬어 본다. 화가의 그리운 자국을 보며 내게 그려진 그리움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내 마음에 물든 그리움은 무엇일까?
우선 가족들의 얼굴이 산발적으로 떠올랐지만 호흡을 고르며 그리움들을 하나씩 눌러본다. 어린 시절 엄마 무릎에 누워 귓구멍을 맡기고 있을 때 젊은 엄마에게 나던 살냄새, 자전거를 잡아주며 격려해 주던 아빠의 목소리, 일요일 아침에 나던 밥냄새, 초등학교 운동장 너머로 넘어가던 노을빛, 비포장도로에서 날리던 흙먼지, 친구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기 위해 서로의 집을 번갈아 가며 바래주던 그 길, 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며 애타게 공중전화의 순서를 기다리던 시간, 야자시간을 땡땡이치던 짜릿함, 대학 합격소식에 모든 긴장이 무너져 내린 그 순간들. 그렇게 내 유년시절의 기억에 점을 찍어 본다.
성인 이후의 시간도 기억속에 흐른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을 때 부서지던 찬란한 햇빛, 실연 후 찾아갔던 바다에 들리던 숨죽인 눈소리, 다시 사랑을 하고 그 사랑에 아파하던 상처의 쓰라림, 어설픈 사회생활을 하며 흘리던 땀냄새, 결혼의 달콤함과 쌉쌀함을 느끼며 그렇게 나의 청춘은 흘러갔다. 지금도 귓가에 쨍쨍거리는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울음소리 그리고 부모님의 마지막 호흡, 웃고 춤추고 싸우고 다시 화해하며 눈물 흘리던 수많은 날들이 별처럼 쏟아지며 눈은 파란색으로 젖어들고 호흡은 깊고 고르게 퍼진다. 마치 김환기의 점이 퍼지듯, 마치 밤하늘의 별이 빛나듯.
나의 그리움은 그저 기쁨만은 아니었다. 나의 그리움은 사랑하는 사람과 있었던 찰나, 그들에게 받은 사랑이기도 했으며 그 사랑과 이별하고 나서도 기어이 내게 보여준 아름다운 장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기도 했고 자연이기도 했고, 글이기도 했고 그림이기도 했다. 많은 것들이 내게 그리움이었다. 나도 화가처럼 내 마음에 한점 한점 점을 찍으며 그리움을 생각하니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빛들이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내게도 그리운 것이 참 많구나. 내겐 그리운 님이 참 많았구나. 이 그리움들이 나란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로구나.
나의 그림움과 너의 그리움이 만든 우주
김환기 <우주 05-IV-17 #200>, 1971,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두 개의 점화가 나란히 붙은 작품이다. 부제는 <우주>였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의 총체이며 삼라만상을 품고 있는 세상이다. 사람도 지구를 품고 있는 거대한 우주처럼, 우주 속에 우주를 품고 더 거대한 우주처럼 긴 지속의 시간을 품고 있다.
두 우주가 만났다.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 나와 너가 함께하는 세계이다. 두 개의 캔버스는 비슷한 모양을 하고 서로를 반영하고 있다. 우주를 보고 있으면 마치 회오리 치는 것 같기도 하고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운동성이 느껴지지만, 점의 균일한 형태를 보면 이 작업은 호흡을 가다듬은 상태로 차분히 작업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많은 호흡을 가다듬었을까? 격정이 올라오는 순간을 어떻게 조절해 나갔을까?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붓질을 했으며 얼마나 고된 육체적 고통을 참아 냈을까?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손은 <창조적 진화>에서 "무언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시간이 기입된 장부가 어딘가는 열린 채로 있다"라고 했다. 베르그손은 '나'란 사람에게는 현재의 자신뿐만이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 현재의 모습으로 진화하기 이전의 태곳적 기억까지, 인간이 되기 전, 동물이 되기 전, 육체라는 물질을 가지기 전의 기억까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어지러울 정도로 과격한 주장이지만 실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는 내가 경험한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기억에 없을 뿐 의식하지 못한 기억 속에는 내가 나로 진화 되기까지의 기억들을 응축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씨앗처럼 말이다.
나란 사람이 진정 우주의 그 기억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한 사람이 내게 온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몸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기억을 담은 정신, 현재 뿐 아니라 과거의 삶 전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까지 함께 다가오는 일일테니 말이다.
그래서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은 너무나 조심스럽고 어렵다. 그와 함께 오는 세계에는 승리의 역사 뿐 아니라 패배의 역사도, 기쁨뿐 아니라 슬픔의 기억도, 사랑뿐 아니라 상실과 고통의 헐벗은 마음도 함께 오기 때문이다. 첫눈에 만나 그의 모든 세계를 알아챌 수는 없다. 그와 같은 파동으로 공명하려면, 그와 공감하려면, 그를 더 깊게 사랑하려면 그 사람의 삶의 맥락에 같이 춤춰야 눈치칠 수 있다. 점 하나하나를 모두 알 수는 없어도 점이 만들어낸 움직임에 같이 흔들려야 한다. 그 움직임은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바람결처럼 조심히 다가가야 느껴지는 일이다. 나를 지우고 너에게 흘러 들어가야 느껴지는 일이다. 내 마음도 그런 바람을 닮을 수 있다면, 그런 바람을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그렇게 '너'의 마음과 함께 춤출 수 있다면 좋으련만.
너와 내가 그리움으로 함께 공명하는 세계
김환기 <하늘과 땅 24-IX-73>, 1973년, 컨버스에 오일, 개인소장
<우주>와 달리 <하늘과 땅>은 다른 파동을 가지고 있다. <우주>가 마치 쌍둥이처럼 같은 모양의 파동이라면 <하늘과 땅>은 방향과 에너지가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하늘과 땅>을 계속 보고 있으면 이 둘의 파장은 만나는 한 순간이 있을 것만 같다. 그것들이 울림이라면, 울림속에 춤추는 그리움들이라면 그것들은 하나의 움직임으로써 다른 하나를 울리게 할 것만 같다.
내가 미쳐 보지 못했던 한 세계가 있었다. 내가 차마 들여다 보지 못했던 세계가 있었다. 그래서 만나지 못하고 미끄러져간 많은 수많은 세계들이 있었다. 사랑을 충분히 전하지 못한 부모님들에게 그랬다. 서운해 하는 친구의 속마음을 알아채기 힘들었다. 돌아서는 연인의 서글픔을 몰랐다. 아이의 울고 있는 까닭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의 세계는 온통 나로 가득 차서 '너'의 세계를 보기가 어려웠다. 그때 나의 세계는 온통 그리움의 그림자였다. 난 그리운 사건 그 자체만 쫒았었다. 이제 없어져 버린, 과거로 사라져 버린 그리움을 다시 되찾고 싶었다.
그러나 김환기의 그림은 말해준다. 그리움은 무수히 많다는 것을, 그리움은 계속 찍어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과거의 것에서 발굴하고, 새롭게 만들며 계속 생성해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땅'의 마음이 '하늘'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은 계속된 울림을 만들어 내는 일뿐이다. 그리움으로 그리움을 만들어 계속 울리는 일뿐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울리지 못했다면 미안한 마음으로 울리고 싶다. 사랑도, 미안함도, 고마움도, 심지어 사랑이 남긴 미움까지도 이제는 그리움이 되어간다. 그렇게 그리움으로 다른 그리움을 만들어 나가 보겠다. '하늘'에 가 닿아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그리움의 점을 찍어 나가겠다.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그리움을 지니고 있다. 그 그리움은 단순한 과거지사가 아니다. 스쳐 지나간 인연이 아니다. 작품을 창조하는, 인생을 창조하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창조 그 자체이며 창조의 재료이다. 하나의 그리움은 작품 전체를 이루었고, 하나의 인연은 나의 삶을 밀고 나가게 해 준다. 김환기의 그리움은 나의 그리움을 울렸다. 한 세계의 그리움은 나의 세계를 울리게 한다. 그렇게 나의 울림은 또 너의 그리움을 울리게 할 것이고, 또 그 연인의 그리움을 울리게 할 것이며, 또 그 가족의 그리움을 울리면서 우리는 계속 그리움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끝없는 그리움으로 연결된다. 별들에게 우주가 하나인 것처럼, 어부에게 바다가 하나인 것처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그리움도 하나이다.
Exhibition Details
한 점 하늘 김환기
2023. 05. 18 - 2023. 09. 10
호암미술관 (용인)
www.leeumho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