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수업 후기: 칼 슈미트 <적과 동지>
적이란 경쟁상대 또는 상대방 일반은 아니다. 또한 적이란 사적인 혐오감 때문에 증오하는 상대방도 아니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방인(이질자)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존재적으로 어떤 타인이며 이질자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칼 슈미트-
적이란 것은 단순한 경쟁상대가 아니다. 적은 나쁘기 때문에, 추하기 때문에 증오하는 것이 아니다. 적은 나와 이질성을 가진 사람이다. 공통분모가 없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 나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기에 이질적 속성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찾아낼 수 있다. 그래서 적은 보편적이며 심지어 인간 전체라고도 할 수 있다. 섬뜩한 이야기다. 사람은 누구나 이질적이기에 나 또한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내가 나쁘거나 못생기거나, 잘못되어서가 아닌 단지 나의 이질적 특성 때문에 나 또한 왕따가 될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칼 슈미트-
정치는 네 편(적)과 내편(동지)을 구분하는 것이다. 정치에서 내편은 동지이고 네 편은 적이 된다. 이 양쪽 어느 편이든 속하면 왕따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어느 편에 들어가야 안전해진다. 이 정치적 이분법은 국가체제를 존속에도 활용되었다. 과거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이들에게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렇게 낙인이 찍힌 이들은 사회를 불안에 빠뜨리는 적이 되고 남은 사람들은 동지가 된다. 낙인이 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은 같은 편이라는 안도감을 느끼며, 한편 혹시라도 자신도 낙인이 붙여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그래서 자신의 결벽을 주장하기 위해 낙인이 찍힌 사람을 더욱 맹렬히 비난하게 된다. 그래서 칼 슈미츠는 국가가 존재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다. 국가는 적과 아군을 구분하며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적과 동지의 구분은 국가나 정치권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일어난다. 사회문화적 관습아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편을 먹으려고 하다. 학교에서 '왕따'라고 낙인 이 찍힌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도우려 하면 같이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괴롭힘에 동조하거나 방관자가 되기도 한다. 여성의 순결을 중요시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 연애를 많은 하는 여성에게는 '문란한 여자'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것이 두려운 다른 여성들은 낙인이 찍힌 여성을 더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남자의 약함은 긍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가 울거나 밥벌이를 못하면 '무능력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런 낙인이 찍히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강인함을 증명하는 삶을 산다. 일에 헌신하며 인생을 바친다.
정치적으로도, 사회문화적으로도 적과 동지가 아닌 관계는 만들 수 없는 것일까? 생각이 다른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해 칼 슈미트는 비관적으로 진단한다. 슈미트는 인간이 '정치'를 넘어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동지(같은 생각)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적에게 저항하지 않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모두를 친구로 두려고 하는 이는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각성된다. 상처받은 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적과 동지로 나누어진 정치적으로 변하게 된다. 여기서 끝일까?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었던 상처받은 영혼은 적과 동지만이 존재하는 정치적인 세상에서 끝을 맞이하는 것일까?
상청입은 '순진'한 존재들이 편입된 '정치'가 인간사의 최종 도달점은 아니다. '정치'의 세계 넘어 순수의 세계가 있다. '순수'한 존재는 어떤 이들인가? 그들은 예측 불가능한 타자들에게 감응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예측 불가능한 이들을 적과 동지로 구분하지 않고 잠정적인 친구로 대할 수 있다.
-황진규-
'순진'한 이들이 타인에게 공감하려 했을 때 상처를 받는다. 이 상처는 네 편 내 편을 나누려는 '정치'적 속성에 휩쓸리면서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순수'한 이는 '순진'한 이들과 같이 타인에게 공감하려 하지만 상처받지 않는다. '순진'한 이들은 상처받을 줄 모르고 타인을 공감하려 했기에 상처를 받았다면, '순수'한 이들은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상처받지 않는다. 감당할 수 있기에 아니, 그 상처를 감당하려 하기에 가능하다.
대학교 때 친구들의 기억도 떠올랐다. 이전 친구들이 나를 배신자라고 욕하며 같이 따돌림을 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나를 욕하던 무리의 한 명이 나를 찾아왔다. 다른 친구들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며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한 명의 친구를 더 얻게 되었다.
순진했던 시절, 정치적이지 못해 상처받았지만 결국 또 다른 친구를 얻을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순진하게 친구의 마음에 공감했다가 상처를 입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는 수개월, 어떤 경우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회복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을 알아본다고 했다. 그때 내가 내어준 마음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믿을 수 있는가이다. 내어준 마음이 다시 나를 찾아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이다.
슈미트는 왜 무저항이 흐리멍텅하다고 했을까? 왜 정치(적과 동지 관계)를 넘어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적과 동지를 넘어서려는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적과 동지 사이를 넘으려 할 때 다른 관계가 열린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공감하지 못해 주고받은 상처들이 있다. 순진함이 끝나고 정치적으로 각성되던 시절, 나는 친구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고 그 상처는 내게 다시 돌아왔다. 이 역시 동시적이지 않았지만 결국 내게 큰 해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상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상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정치적인 것을 대신할 다른 선택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