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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Aug 11. 2023

상처 입으려 할 때, 상처 입지 않는다.

철학수업 후기: 칼 슈미트 <적과 동지>

# 칼 슈미트의 '적'과 '동지'


적이란 경쟁상대 또는 상대방 일반은 아니다. 또한 적이란 사적인 혐오감 때문에 증오하는 상대방도 아니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방인(이질자)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존재적으로 어떤 타인이며 이질자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칼 슈미트-


적이란 것은 단순한 경쟁상대가 아니다. 적은 나쁘기 때문에, 추하기 때문에 증오하는 것이 아니다. 적은 나와 이질성을 가진 사람이다. 공통분모가 없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 나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기에 이질적 속성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찾아낼 수 있다. 그래서 적은 보편적이며 심지어 인간 전체라고도 할 수 있다. 섬뜩한 이야기다. 사람은 누구나 이질적이기에 나 또한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내가 나쁘거나 못생기거나, 잘못되어서가 아닌 단지 나의 이질적 특성 때문에  나 또한 왕따가 될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칼 슈미트-


정치는 네 편(적)과 내편(동지)을 구분하는 것이다. 정치에서 내편은 동지이고 네 편은 적이 된다. 이 양쪽 어느 편이든 속하면 왕따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어느 편에 들어가야 안전해진다. 이 정치적 이분법은 국가체제를 존속에도 활용되었다. 과거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이들에게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렇게 낙인이 찍힌 이들은 사회를 불안에 빠뜨리는 적이 되고 남은 사람들은 동지가 된다. 낙인이 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은 같은 편이라는 안도감을 느끼며, 한편 혹시라도 자신도 낙인이 붙여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그래서 자신의 결벽을 주장하기 위해 낙인이 찍힌 사람을 더욱 맹렬히 비난하게 된다. 그래서 칼 슈미츠는 국가가 존재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다. 국가는 적과 아군을 구분하며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적과 동지의 구분은 국가나 정치권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일어난다. 사회문화적 관습아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편을 먹으려고 하다. 학교에서 '왕따'라고 낙인 이 찍힌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도우려 하면 같이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괴롭힘에 동조하거나 방관자가 되기도 한다. 여성의 순결을 중요시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 연애를 많은 하는 여성에게는 '문란한 여자'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것이 두려운 다른 여성들은 낙인이 찍힌 여성을 더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남자의 약함은 긍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가 울거나 밥벌이를 못하면 '무능력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런 낙인이 찍히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강인함을 증명하는 삶을 산다. 일에 헌신하며 인생을 바친다. 


정치적으로도, 사회문화적으로도 적과 동지가 아닌 관계는 만들 수 없는 것일까? 생각이 다른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해 칼 슈미트는 비관적으로 진단한다. 슈미트는 인간이 '정치'를 넘어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동지(같은 생각)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적에게 저항하지 않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모두를 친구로 두려고 하는 이는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각성된다. 상처받은 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적과 동지로 나누어진 정치적으로 변하게 된다. 여기서 끝일까?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었던 상처받은 영혼은 적과 동지만이 존재하는 정치적인 세상에서 끝을 맞이하는 것일까?





# '적'과 '동지'를 넘어서는 방법

 

슈미트의 말에 따르면 정치는 적과 동지를 가르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적 개념을 구성하는 적과 동지의 개념이 없어져야만이 정치의 한계에 갇히지 않게 된다. 그 방법은 적을 없애거나, 동지를 없애는 것이다. 적을 없애는 것은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가 원수를 사랑했듯이 모두를 사랑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또 하나는 동지를 없애는 것이다. 애초에 동지가 없다면 짝개념인 적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동지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동지 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적을 만들지 않게 된다. 그러나 예수처럼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고, 세상과 편먹지 않고 홀로 존재하는 것도 무서운 일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적과 동지로 구분되는 정치적 관계를 쉽게 선택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상처받은 이들은 자신의 상처로 인해 방어가 높다. 또다시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마음과 멀어져 지내려 한다. 이런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의 아픔을 알아봐 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다시 상처 입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상청입은 '순진'한 존재들이 편입된 '정치'가 인간사의 최종 도달점은 아니다. '정치'의 세계 넘어 순수의 세계가 있다. '순수'한 존재는 어떤 이들인가? 그들은 예측 불가능한 타자들에게 감응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예측 불가능한 이들을 적과 동지로 구분하지 않고 잠정적인 친구로 대할 수 있다.
-황진규-


'순진'한 이들이 타인에게 공감하려 했을 때 상처를 받는다. 이 상처는 네 편 내 편을 나누려는 '정치'적 속성에 휩쓸리면서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순수'한 이는 '순진'한 이들과 같이 타인에게 공감하려 하지만 상처받지 않는다. '순진'한 이들은 상처받을 줄 모르고 타인을 공감하려 했기에 상처를 받았다면, '순수'한 이들은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상처받지 않는다. 감당할 수 있기에 아니, 그 상처를 감당하려 하기에 가능하다. 



# 순진해서 상처받았고 그래서 정치적이었던 시간들


초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가 있었다. 요즘 말하는 왕따와는 좀 다르지만 힘이 세고 성격이 거친 소위 일진의 괴롭힘이었다. 체육시간에 일진은 한 아이를 대놓고 괴롭혔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어나서 일진을 막아섰다. '너 그러면 못...'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이 휘청 거렸다. 일진이 내 뺨을 가격한 것이었다. 너도 때려봐 X 년아'하면서 내게 소리를 질렀다. 난 할 말을 잃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난 순진하도록 무방비했다. 내가 막아서면 멈춰질 줄 알았다. 그러나 일진은 내게 더 큰 폭력을 행사했고 나는 반격할 힘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일이 내겐 한동안 충격이었다. 뺨을 얻어맞은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폭력 앞에서 이토록 무기력해 보기도 처음이었다.


대학교 때 동기 한 명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 친구를 미워하는 이유가 타당해 보이지 않았다. 나와 하굣길이 같은 그 아이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기존의 내 친구 무리들이 우리를 더 미워했다. 기존의 친구들은 슈미트의 정의대로라면 친구가 아닌 동지였던 것일까?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나 역시 자신들을 배신한 적으로 취급했다. 


순진했던 시절의 일이다. 그리고 그 뒤로 조금씩 정치적 각성이 일어났다. 조금 더 편하고 안전하게 살고 싶어 졌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졸업 후에도 동기들은 그 아이를 계속 소외시켰다. 하지만 당시 난 그 친구를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친구와 조금씩 조금씩 멀어졌다. 내가 그 친구를 적극적으로 밀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도 않았다. 그렇게 소식이 끊기고 몇 년 후 친구의 변고를 듣게 되었다.


환멸을 느꼈다. 인간에 대한, 나와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그 뒤로 나는 나를 비롯한 세상을 믿기 어려워졌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짓을 할까 봐 두려워졌다. 내가 감당하지 못해서, 내가 책임지지 못해서 만들게 될 상처가 두렵기만 했다. 끝까지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 내가 널 버렸다는 생각, 그것은 깊은 상처가 되었다. 아직도... 넌 내게 살아있는 아픔이다.




# '상처'를 품고 '정치'를 넘어서려 할 때


아픔을 안고 어떻게 정치적 관계를 넘어갈 수 있을까? 과거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소외된 친구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내게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그들에게 공감하려 할 때 내게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내게 남겨진 것이 과연 상처뿐이었을까?


초등학교 때 내 뺨을 때린 일진 친구를 몇년 후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학원을 마치고 늦게 귀가하던 중에 불량배들과 어울리고 있던 그 아이를 보게된 것이다. 그 아이는 불량배들에게 돈을 뜯길 위기에 처한 나를 해주었다. 그 일진 친구는 불량들과 한패였지만, 같은 편인 불량배 동지들을 배신하고 내 편이 되어 주었다. '내 친구야, 건들지 마!' 라며 나를 보호해 주었다. 그때 그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 자신에게 대들던 나를 고깝게 여긴 것이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며 피하기만 할 때, 자기에게 친구로서 말 붙여준 것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대학교 때 친구들의 기억도 떠올랐다. 이전 친구들이 나를 배신자라고 욕하며 같이 따돌림을 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나를 욕하던 무리의 한 명이 나를 찾아왔다. 다른 친구들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며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한 명의 친구를 더 얻게 되었다. 


순진했던 시절, 정치적이지 못해 상처받았지만 결국 또 다른 친구를 얻을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순진하게 친구의 마음에 공감했다가 상처를 입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는 수개월, 어떤 경우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회복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을 알아본다고 했다. 그때 내가 내어준 마음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믿을 수 있는가이다. 내어준 마음이 다시 나를 찾아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이다. 



슈미트는 왜 무저항이 흐리멍텅하다고 했을까? 왜 정치(적과 동지 관계)를 넘어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적과 동지를 넘어서려는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적과 동지 사이를 넘으려 할 때 다른 관계가 열린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공감하지 못해 주고받은 상처들이 있다. 순진함이 끝나고 정치적으로 각성되던 시절, 나는 친구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고 그 상처는 내게 다시 돌아왔다. 이 역시 동시적이지 않았지만 결국 내게 큰 해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상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상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정치적인 것을 대신할 다른 선택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십수 년 만에 연락온 동창 녀석이 한 뭉탱이의 하소연을 쏟아놓고는 간다. 오해를 하던 친구가 조심히 그리고 간절히 마음을 놓고 간다.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불안해하는 부모를 만난다. 가슴속 깊숙이 한숨을 뿜어내는 아이를 만난다. 어쩌면 이들은 그때의 내가 지켜주지 못한 친구의 분신인지도 모른다. 내가 힘이 있다면 아니, 내 힘만큼 최대한 이들을 지켜주고 싶다. 힘껏 안아주고 싶다. 이들의 기쁨이 내게도 기쁨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을, 이들의 슬픔이 내게도 슬픔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을 안다. 기꺼이 상처받으려고 할 때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믿는다. 적과 동지가 어느 순간 기적처럼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너머의 세상을 한 조각 상상해 볼 수 있기에 이전과는 다른 선택지를 향하여 간다. 한 걸음씩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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