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는 선과 색은 모두 내면의 눈으로 본 것이다. 기억에 의존하고, 다른 것을 더하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부는 그리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내 그림은 매우 단순하고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다. -에든바르드 뭉크-
뭉크 <담배를 쥔 자화상> 1895, 캔버스에 오일, 110X85, 오슬로 국립 미술관
네덜란드의 화가 뭉크는(Edvard Munch, 1863–1944) 인간의 실존적 불안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평생을 바쳐 고민한 화가입니다.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과 가까이 있었죠. 5살 때는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였고, 엄마처럼 의지하였던 큰누나 소피도 몇 년 후 결핵으로 사망을 하게 됩니다. 남동생은 20대 나이에 요절을 했으며 여동생은 정신질환을 앓게 되어 요양원에서 사망을 하게 됩니다. 뭉크 자신도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학교 생활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외부의 사람들과 접촉하는 대신 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가족들의 우울하고 불안한 정서를 함께 공유하면서 자라나게 된 것이죠. 뭉크에게 죽음과 불안은 어린시절부터 가까이 붙어 있는 주제였습니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뭉크 <절규> 1893년, 오일, 파스텔, 템페라 등, 91X73.5cm,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뭉크는 미술사에서는 “표현주의” 작가로 분류됩니다. 표현주의는 미술이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내면의 감각과 감정을 ‘표현’하는데 주력하는 미술운동을 말합니다. 그래서 표현주의는 왜곡과 과장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태는 변형되고 색채는 과장되거나 단순화되어 표현되곤 합니다. 뭉크는 <절규>라는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방식으로도 패러디되었던 작품이지요. 이 작품속에서 다리를 걷고 있는 주인공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일그러져 있지만 도망갈 수도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 보입니다. 그를 공포스럽게 만든 다리 주변의 풍경은 마치 자연재해라도 일어난 것처럼 핏빛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뭉크의 작품은 형태가 모호하고 경계가 불분명하며 흐느적 거리는 선으로 표현됩니다. 뭉크는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라고 했습니다. 인상주의가 유행하던 시기에 유럽의 다른 화가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리려 했다면 뭉크는 본 것을 그린다고 했습니다. ‘본 것'을 그린다는 것은 본 것에 대한 '기억'을 그린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뭉크의 그림은 눈에 보이는 대상 자체가 아닌 그 대상을 마주했을 때의 자신의 내면에 대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편집'되고 '해석‘되는 것입니다. 뭉크는 자신의 기억에 따라 그 기억을 편집했으며 주관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겪은 슬픈 일들을 그렸습니다. 바로 가족들의 죽음이었죠. 그리고 연인들과의 관계를 기록합니다. 여인을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황홀함, 그리고 이별의 슬픔에 대해 표현했습니다. 뭉크의 작품은 자신의 내면의 감정에 따라 표현했기에 그림의 묘사가 분명하지도 색채가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마음의 풍경이라는 것은 것은 모호하고, 흐트러지고, 아리송한 것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불확실성을 긍정하며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인생의 여정인지도요.
불안과 질병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방향타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다.
뭉크 <사춘기> 1894년, 캔버스 유채, 151.5-110cm, 오슬로 국립미술관
뭉크는 평생 불안, 우울, 망상, 알코올 중독 등의 정신이상 증세로 고통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자신의 혼란을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직면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불안과 긴장감으로 가득합니다. 자화상뿐 아니라 친구나 연인을 그린 초상화에서도, 풍경을 그린 그림에서도 마치 뭉크의 일기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위 그림에는 사춘기 소녀가 앉아 있습니다. 사춘기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에는 신체적 변화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큰 변화를 겪게 되면서 혼란을 겪게 됩니다. 무언가 세상을 더 알고 싶어 셀레이지만 두려움도 동시에 일어나는 시기이지요. 그림 속 소녀는 몸을 움츠린 채 잔뜩 긴장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네요. <사춘기>는 뭉크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이기도 합니다. 뭉크의 그림에서는 삶과 죽음, 생성과 파멸, 밝음과 어둠,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그 사이 치열한 긴장감이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뭉크는 사춘기에서 어떻게 성숙의 길로 가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불안을 어떻게 극복해 나갔을까요? 뭉크는 자신의 불안을 계속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불안과 질병은 뭉크의 삶을 이끈 거대한 주제였습니다. <지옥에서의 자화상>은 연인 툴라와의 갈등하다가 총기 사고가 발생하여 손을 크게 다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 후 툴라와는 이별을 하게 되고, 이후로 여성과는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게 됩니다. 계속되는 실연과 불안한 정서로 비록 지옥에 있는 것 같은 심정이었지만, 그림 속 뭉크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맨 몸으로 불길 속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선명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뭉크는 언제나 자신을 응시했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상처를 직면했습니다.
불안을 극복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저 알아채 주세요
삶을 이끄는 것이 밝고 긍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은 기쁨과 함께 슬픔도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이별, 죽음, 상처, 외로움 같은 지독한 문제가 삶을 이끌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그 문제가 자신의 삶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뭉크 병약한 신체와 신경증으로 고통받으면서도 2만 5천여 개의 작품을 완성시킵니다. 불안 그 자체에 잠식되거나, 떠밀려 가지 않고 적극적으로 마주한 것이지요.
심리학에서는 불안이 생기는 이유를 다양한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불안은 잠재적 위험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신체적 반응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산에서 곰을 만나게 되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몸이 긴장이 될 테지요. 이는 뇌가 위험에 대비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때는 맞서 싸우거나 죽은 척을 하거나, 아니면 줄행랑을 치는 등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상의 문제는 드러나지 않는 위험에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불안이 생기는 이유가 심리적 에너지(리비도)가 해소되지 않아 발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원초적 욕구(이드)를 정신적 의지(초자아)로 억압하기 때문인 것이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 혼나지 않을까? 혹시 비난을 받지 않을까?라며 억압했던 욕구가 불안 증상을 야기시키게 됩니다.
실존주의 상담가 얄롬은 인간이 실존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 불안을 경험한다고 보았습니다. 죽음, 자유, 소외, 무의미 네 가지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입니다. 이 네 가지 문제에 대해 부정했을 때 불안이 촉발하게 됩니다. 죽음, 자유, 소외, 무의미는 삶에 존재하는 것들인데 삶에 있는 것을 외면하는 모순된 마음 때문에 불안이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앞서 설명한 세 가지 불안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와 실제 나와의 불일치입니다. 내가 갖고자 하는 심리상태(안정)에 대한 불일치, 욕구대로 살지 못하는 삶에 대한 불일치, 세계에 실존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에 대한 불일치에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뒤집어 보면 불안은 하나의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불일치를 알려주는 신호인 것이죠. 이 불일치를 잘 해결하는 방법은 불안한 감정에 대한 이해와 수용입니다.
우선 불안한 감정을 알아채야 합니다. 그 감정이 알아차려졌을 때 불안한 감정을 계속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불안은 불일치를 알아봐 달라는 신호이니 말이죠. 불안은 회피 하면 할 수록 그 힘이 강해집니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자신을 알아봐 달라고 계속 아우성치게 됩니다. 불안을 극복하려고 하지 마세요. 먼저 알아채 주세요. "나 지금 불안하구나" 이렇게 말하면서 불안한 감정을 이해하고 돌보아 주세요. 그것이 불안을 다루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