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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Sep 02. 2023

바람이 나를 이룬다.

강요배  <팽나무와 까마귀>


폭낭(팽나무의 제주 방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만 리에서 날아온 바람이 여기 와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폭낭과 대화하다 간다...저 작은 가지들은 그런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자라고 기억한다. 바람의 기록이 저 가지다.
- 강요배 <풍경의 깊이> -


강요배 <'바비'가 온 정원>, 2021, 캔버스에 아크릴, 194X520cm


<'바비'가 온 정원>은 2020년에 태풍 바비가 제주도에 들이닥친 모습을 그린 것이다. 태풍의 모습이 어찌나 심한지 정원의 나무를 거세게 흔들어 놓고 있다. 강요배 작가는 이 그림을 그릴 때 붓 외에도 지푸라기나 종이를 구겨 바람이 부는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가로 6미터가 넘는 대형 캔버스 위를 작가에 손은 때로는 거센 태풍이 되어 캔버스를 긁어내고, 때로는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캔버스 위로 흐트러진다. 태풍 '바비'의 위력이 어찌나 심한지 나무가 외풍을 잘 견뎌 냈을까 싶은 걱정이 들기도 하다. 이 휘청거리는 나무를 그리는 작가의 마음, 그리고 나무 위에 바람을 거칠게 표현했던 그의 마음에 잠겨 본다.


정원을 할퀴고 지나갔을 태풍 같은 바람. 자연에 부는 태풍은 우리 인간의 마음에도 들이닥친다. 나무의 가지가 휘청거릴 듯이, 뿌리가 뽑힐 듯이 불어오는 큰 바람을 때때로 맞이한다. 그럴 때마다 몸을 작게 숨기고 기다린다. 큰 피해 없이 이 시간이 지나가길, 큰 상처를 내지 않고 태풍이 지나가길, 태풍이 가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여 후회를 남기지 않기를 바라며 숨을 죽인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큰 바람이 불면 몸을 낮추고 그 바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것 밖에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팽나무는 바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만리넘어 날아온 바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겨울이면 북쪽의 마른땅을 훑고 온 소식을 듣는다. 여름이면 남태평양 바다에서 타고 온 냄새를 전해 듣는다. 그리고 팽나무는 바람에게 들려준다. 이곳 흙냄새를, 이곳의 바다 냄새를, 이곳에서 바라본 나무의 기억을 들려준다. 그렇게 바람은 팽나무를 만나 성질이 바뀌고, 팽나무는 바람을 만나 모양을 바꾼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존재가 된다.






강요배  <팽나무와 까마귀>, 1996, 캔버스에 아크릴, 97X162.2cm


팽나무는 강인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해안가에서도 환경에 순응하며 바다를 등지고 자라난다. 팽나무는 바닷바람을 견디면서 살아남기에 포구나무(팽나무의 전라도 방언)라고도 불린다. 어디서든 살아남는 강인함이 있다. 나무기둥은 바람을 버티고,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린다. 자신을 강하게 버티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람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팽나무는 그렇게 살아남았나 보다. 홀로 자신을 견디며, 그리고 너에게 자신을 내맡기며 그렇게 살아남았나 보다. 그렇게 바람을 따라 자신의 모양을 만들어 갔나 보다.


나는 내게 불어온 바람을 어떻게 맞이했었나. 거센 그 바람이 무서워 몸을 숙였다. 거센 그 바람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그 바람을 만나지 않기를 바라왔었다. 하지만 태풍이 아주 심하지만 않는다면, 생명을 해칠 정도가 아닌 한에 태풍은 선물을 주고 간다. 어떤 바람은 약한 가지를 부러뜨려서 더 단단하게 자라게 한다. 어떤 바람은 나무의 모양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그 세기에 따라 나무는 점점 자기다워진다.


지금 내 모양을 만든 것은 바람의 흔적들이다. 너란 바람을 만난 흔적이다. 너란 세계를 만난 기억이다. 난 너란 세계가 내 온몸을 훑고 지나가면서 만들어진 모습이다. 나무에게 필요한 것은 햇빛과 물만이 아니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어쩌면 너란 바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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