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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Oct 06. 2023

감정인식과 직업병 그리고 친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감정표현이 어렵다는 것을 의식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감정 표현이 어렵다는 인식이 있다면 그래도 괜찮다. 언젠가 표현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자신이 감정 표현이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감정은 심리적 욕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욕구의 충족여부를 반영한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흔히 말하는 부정적 감정으로 드러난다. 슬픔과 관련된 괴로움, 불쾌함, 두려움, 불안함 등의 감정이다. 충족된 욕구는 기쁨의 감정으로 드러난다. 행복, 사랑, 만족, 안정감과 같은 감정들이다.


기쁨과 관련된 감정은 흔히 긍정적 감정이라고 하고, 슬픔과 관련된 감정은 부정적 감정이라고 한다. 이 긍정과 부정이라는 단어에는 가치평가가 들어 있다. 긍정은 좋은 것이고 부정은 나쁜 것이라는 평가가 들어있는 표현이다. 감정의 종류에는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없다. 감정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은 내 욕구가 보내온 신호이다. 나의 욕구가 충족되었는지 아니만 미충족 되었는지에 따라 감정은 기쁨 또는 슬픔으로 갈라진다.


이렇듯 감정을 잘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심리적 욕구, 나의 필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를 잘 인식할 수 있는 길이다. 나의 필요를 잘 인식하는 사람은 그 필요를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하며 그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만한 방법을 찾으려 한다. 알게 되면 찾고자 하고, 찾게 되면 실행하게 된다.


대개는 욕구가 미충족된 슬픔의 감정을 인식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우리 사회는 슬픔의 정서를 부정해 왔다. 그래서 슬픔 계열의 감정을 '부정적 감정'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던가. 우는 사람에게 "울지 마" 화내는 사람에게 "화내지 마" 괴로운 사람에게 "괴로워하지 마"라고 쉬운 위로의 말을 보내지만 "- 하지 마"라는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슬퍼서 울고, 화나서 소리 지르고 괴로워서 신음하는데, 하지 말라고만 하면 감정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부정된 감정은 내면으로 기어들어가 숨어버린다. 슬픔의 감정을 보이면 부정응적 사람으로 보이기에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슬픔 감정을 심연에 가둬버린다. 슬픔은 나오지 말아야 할 감정, 드러내야 하지 말아야 할 감정이 된다.  그렇게 슬픔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수치스러움이 된다.


슬픔의 감정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 사회생활을 할 때 너그러워 보이는 사람이 가족과 같은 친밀한 사이에서는 폭력적으로 행동하기도 하고, 슬픔뿐 아니라 기쁨의 정서까지 둔해지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슬픈 일화를 말하는데 웃으며 말하기도 한다. 마치 제삼자의 일처럼 말하기도 한다.


말과 태도에서 부조화를 보이면 직업의식이 발동하여 물어본다. 말의 내용을 들으면 참 슬픈데 힘들지 않으시냐고 묻는다. 그러면 말한 사람이 한번 더 생각한다. '나 정말 괜찮은 걸까?' 그때 자신의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며 자기감정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요. 아직 감정이 해결되지 않네요" 혹은 "듣고 보니 그것은 속상한 일이었네요. 제가 슬픔을 느끼지 못한 거네요."라고 말하다. 하지만 모두 이렇게 자기감정과 잘 접촉되어 언어화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흥분하고 부정하며 화를 내기도 한다. 슬픔의 다른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라도 감정이 드러났다면 감정의 기원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감정 속 들어 있는 또 다른 감정, 깊은 핵심 감정과 만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만났을 때 더 많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기쁨의 감정을 숨기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욕구를 숨기며 살아온 사람들이 그렇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슬픔의 정서를 부정당했듯이 기쁨의 정서를 부정당했다면 마찬가지로 정서를 느끼기 어려워진다. 이 또한 훈육의 결과일 수 있다. 부모가 '자만하지 마라', '너무 좋아하면 부정 탄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란 경우이다. 자신이 가진 좋은 것을 티를 내면 타인의 질투를 사게 되고 미움을 받은 경험이 있거나 그렇게 들었기 때문이다. 과도한 겸손의 문화에서 자라난 경우 기쁨을 감추게 되고 급기야 기쁨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된다. 기쁨을 잘 느끼는 것은 중요하다. 기쁨은 자신의 충족된 욕구가 무엇인지 인식하게 하고 내가 삶에서 어떤 심리적 욕구를 중요시 생각하는지 깨닫게 한다. 내게 정말 중요한 것, 내가 지키고 싶은 것, 내가 펼치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 그리고 그 길로 가게 한다.  






  그렇다면 모든 상황에서 항상 감정을 인식해야 할까?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을 가로막고 있다면 그것을 발견한 이가 말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감정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해도 기쁜 경우는 예외로 두자. 기만적인 기쁨이 아니라면 예외로 두자. 해가 되지 않는 기쁨이라면 예외로 두자. 대신 같은 감정에 머물러 주자. 너의 감정의 파도에 같이 흔들려 주자. 너의 설레임에 같이 요동쳐 주자. 그렇게 너의 감정에 비언어적인 공감을 보내 주자.


친구가 새로 시작된 연애 이야기를 했다. 말의 내용은 상대가 너무 괴팍하고 자신을 소중히 대하지 않는다며 투덜거렸지만 친구의 말투와 눈빛에서 설렘이 느껴졌다.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타자에게 매혹되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너 좋아 보인다" 라는 나의 말을 친구는 부정한다. "아니야. 나 힘들어. 나와 다른 면이 많아서 피곤해. 결코 좋지 않아."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의아스러웠다. 친구는 슬픔의 감정을 억압시키고 살았듯이 기쁨도 억압하며 살아온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칭찬받거나 주목받는 것을 힘들어했다. 나는 친구가 자신이 잘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거나 쉽게 만족하는 것을 어려워했다는 것을 기억했고 그제야 친구의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는 직업병이 발동하여 너의 말과 태도가 다르다고 말해주려고 했다가 그 말을 삼키었다.


자신이 사랑에 빠진 줄도 모르고 사랑에 빠진 친구의 얼굴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자신이 사랑에 빠진 것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할까. 이미 사랑에 빠진 것을. 이미 너무 행복한 것을 말이다. 오랜만에 웃는 너의 얼굴이 참 예쁘다.


어쩌면 감정을 인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감정을 잘 느껴줄 누군가가 아닐까? 혼란스러운 감정에 기꺼이 함께 흔들려줄 그 사람이지 않을까? 너와 내가 같은 파동에 흔들리는 동안 모호한 감정은 서서히 의식으로 떠오를테니 말이다. 그렇게 감정은 모습을 드러낼테니 말이다.


그림 출처. 조셉 로루소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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