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랑스 드빌레르 <모든 삶은 흐른다>와 연계한 이미지 작업
힘들었던 어느 날 부산에 갔다. 큰 기대가 없었다. 온전히 바다를 만났던 날에 대한 기억을 잊은 지 오래였다. 그렇게 바다를 보았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찰방거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내 고통도 멈춘 것 같았다. 바다는 내 마음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아무 말 없이 내 마음을 보듬어 주었다. 이성복 시인의 <바다>의 시구처럼 '서러움'이 흰 물거품을 입에 물고 달려와 내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 같았다.
바다는 평화와 고요만이 있지 않다. 바다에는 사랑과 함께 상실이 있다. 바다에는 모험과 두려움이 있으며 생명과 죽음이 있다. 그런 바다는 삶을 닮았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쓸려나가듯이 삶에서도 사랑이 채워지기도 하고 비워지기도 한다. 원하던 사랑을 상실하고 나면 깊은 고통이 온다. 떠난 사랑이 언제 다시 나를 찾아올지 믿기 어렵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사랑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안다. 밀려 나간 바닷물은 다시 내 안에 고여 든다. 바다에 밀물과 썰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의 마음은 고요해진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동요된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런 바다를 보며 위로를 받는다. 생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간직한 그 바다를 보며 위로를 받는다. 삶이 저 바다와 같이 밀려 들어오고 쓸려나간다는 것을 알기에, 내 삶도 저 바다와 같다는 것을 알기에, 기쁨과 슬픔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기에.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 채 바라보는 바다는 언제나 위로가 된다.
바다는 무엇인가? 바다의 상징은 무한한 생명이다. 생명을 구성하는 원초적 재료로써의 물이며 끝없이 파도치는 움직임이다. 바다는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삶이기도 하고 죽음이기도 하다. 죽음으로써 다른 삶을 향하기도 한다. 바다는 헤아릴 수 없다. 모든 것을 품고 있지만 바다의 작은 일부만을 알 수 있기에 바다는 신비이다. ¹
왜 바다에 매혹되는가? 바다는 신비로운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다. 바다와 삶은 생명이다.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생명이다.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전부를 드러내지 않는다. 살아온 만큼 알 뿐이고 가는 만큼 어디에 있는지 알 뿐이다. 삶은 모호하다. 그래서 두렵고 불안하지만 그 모름에 매혹된다. 나도 모르게 이끌린다.
바다는 우리를 유혹한다. 이 바다를 건너가라고 손짓한다. 고대 서양에서는 인생을 '항해'로 비유했다. ² 인생과 항해의 공통점은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의 이동이라는 것이다. 배가 항구에서 항구 사이를 여행하듯이 인생도 저기-어디에서 지금-여기로, 또다시 저기 어딘가로 이동한다. 미지의 세계를 여러 번 여행할 수도 있겠지만 최종 목표는 결국 떠나온 항구, 고향, 조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은 오딧세우스가 트로이의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회귀하는 여정과도 같다. 안식처로 돌아오기 위해 위험한 한 해를 감행해야 하는 것이다.
안식처는 편안한 안락의자가 있는 공간이 아니다. 여기서 안식처는 '자기 자신'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이 항해를 "나로 돌아가기 위한 평생의 여정"이라 설명했다. 이 항해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있던 곳(훈육된 나)에서 다른 곳(훈육되지 않은 본래의 나)으로 가야 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폭풍우나 빙하를 만나 배가 침몰할 수도 있다. 항해 중간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세이렌을 만나 유혹이 빠질 수도 있다.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감행하는 여정이기에 항해를 시작한다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항해라면 그 항해를 시작하겠는가? 이것이 바다라면 그 바다로 들어가겠는가?
인생이라는 바다 그리기
바다에 소중한 것, 좋아하는 것, 내가 가졌던 것들을 적고 바다색을 칠했다. 도화지에 물을 흠뻑 적신채 파도가 치는 것처럼 흔들어 보기도 하고 비가 내리는 것처럼 흘러내려보기도 했다. 소유했던 것들이 떠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자연스레 그렇게 떠나려 가도록 내버려 두게 된다. 왠지 그것들은 나를 떠나게 될 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들이 나를 떠나고 나면 내게 또 다른 인연이 찾아올 것이라는 자연한 이치도 알게 된다. 마치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는 바다처럼 말이다.
도화지를 흔드는 순간 알아챈다.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난 시간 가졌던 것, 이제 놓쳤던 것들이 아니라 지금-여기서 물의 움직임을 조정하는 일이란 것을 말이다. 물이 도화지 밖에 흐르지 않도록, 나는 물길을 찾고 힘을 조절하는 선원의 마음이 된다. 항해에서 중요한 것은 내 배에 태운 물건이나 지난 항구에 두고 온 무언가가 아니다. 이 바다 위에서 생존하는 것. 그러기 위해 바다를 이해하고 바람을 이용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깨닫게 된다.
한참 놀이를 한 바다의 흔적을 찢어 ‘나의 바다’를 재구성했다. 종이가 찢어지면서 자연스레 하얀 포말이 생겨났다. 찢어진 흔적을 보며 요동치는 바다의 호흡이 느껴졌다. 조금씩 조절하며 파다의 수평은 고요하게 만들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하지만 바다에 어느 정도의 파도는 남겨두었다. 멀리서 바다를 볼 때는 고요해 보이지만 바다 한가운데 있다면 그 바다는 고요할 수 없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도, 인생을 사는 것도 거대한 생명을 품은 두려움과 함께하는 일임을 안다. 바다에 있는 것이 기쁘고 상쾌한 기분은 아니다. 그러나 생성이 주는 꿀렁거림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나는 그런 바다 위에 있다. 생명의 바다 위에.
함께 그리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준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바다에 잔잔함도 있지만 거친 파도가 치는 것이 일상이듯이 우리의 감정도 그렇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일더라도 곧 나름의 질서를 찾아간다. 혼란스러움을 받아들이고 견뎌내다 보면 다시 고요해지시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견딘다는 것은 자기희생을 하며 억지로 참아낸다는 것이 아니다. 파도의 흐름에, 감정의 흐름에 나를 맡기고 혼란스러움을 직면하는 것이다.
견디는 과정 속에서 나처럼 물결치는 다른 파도를 만나게 된다. 두 파도가 만나 더 거세지기도 하지만 큰 대양을 만나 고요해지기도 한다. 가끔은 그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도 만나게 된다. 바다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찾아가다 보면 그 과정에는 늘 나와 같이 고민하는 이웃을 만나게 된다. 삶은 혼자 갈 수밖에 없는 여정이기도 하지만 그 바다 위에 나는 혼자이지 않다. 나는 그런 바다 위에 있다. 저마다의 호흡을 품은 바다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