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이가 '질투'라는 단어를 던져놓고 떠났다. 나는 '질투'를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나 역시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말 내가 질투했을까 봐, 그것이 사실일까 봐, 그래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봐 두려웠다. 깊은 마음속에는 나의 나약함이 들통날까 봐 두려웠다.
아우구스트 스트랜드베리 <질투하는 밤>, 1893 (c) 스웨덴 스트랜드베리 뮤지엄
대체 질투가 무엇이길래 우리는 이토록 질투를 겁내했던 것일까?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랜드베리(1849~1912)의 <질투하는 밤>은 질투가 품고 있는 격정적인 감정을 잘 보여준다. 그림 속에는 검정, 회색, 흰색 등의 무채색과 암녹색의 물감이 거칠고 격렬하고 혼란스럽게 칠해있다 하늘은 쏟아지는 빗물과 함께 무너질 듯이 위태롭고 바다는 이미 많은 것을 집어삼킨 듯이 혼란스럽다.
얼핏 하늘과 바다를 묘사한 것 같지만 어디가 어디인지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물감의 양과 붓터치가 잘 조절되지 않은 채 표현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거친 표현은 질투와 함께 동반하는 감정들을 잘 전달한다. 질투는 불안, 두려움, 죄책감, 상실감, 미움, 후회 등 불편하고 슬픔 감정들이 뒤범벅되어 드러난다. 질투는 못마땅하고 추하다. 이런 하늘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런 질투를 결단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질투라는 감정은 매우 불편하다.질투하는 사람에게 찍히는 낙인이 있기 때문이다. 질투하는 사람은 결핍되어 있고 욕심이 많고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오명이다. 그러니 '질투'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수치스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성숙하고 싶다는 알량한 자존심에 질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렇게 외면하고 홀대하던 질투가 상실의 고통과 함께 찾아왔다.
질투는 무엇인가?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질투를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며,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여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 있어서 미움"이라고 정의했다.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은 기쁨에서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것을 너에게 뺏길지도 모른다는 상실의 두려움, 나는 기쁨에서 배제된다는 소외감, 그 소외가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는 불확성이 불안을 야기한다. 그러니 너의 기쁨은 내게 슬픔이 될 수 있다.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의 슬픔은 나 혼자 슬프지 않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너도 가지지 못했다는 생각은 찌질하게도 위로를 준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불확실하고 자신이 없을수록 타인의 불행은 안심이 된다. 내가 아직 가지지 못했다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경감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의 슬픔은 내게 기쁨이 될 수 있다.
질투라는 감정 속에 있는 기쁨과 슬픔 모두 자신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내포되어 있다.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것, 내가 가지고 싶은 것(가령 돈, 행복, 사랑, 명예, 인정)을 누군가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상상할 때 질투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기름을 붓고 타오른다.
이 뜨거운 감정 질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내 삶의 질투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언제 질투의 감정을 느꼈을까? 그리고 질투는 내게 무엇을 남기고 갔을까?
에드바르 뭉크 <질투>, 1895, 캔버스에 오일
질투, 가지지 못하면 파괴하고 싶은 마음
어린 시절 오빠를 질투했다. 오빠는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 같았다. 나도 오빠처럼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오빠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오빠의 뽀얀 피부, 귀여운 보조개, 그리고 2년이나 일찍 태어나서 얻게 된 인지 능력 같은 것을 어린 내가 넘어설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오빠의 단점을 지적하고 오빠가 잘못한 것을 비난하면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엄마의 사랑)에 대한 슬픔을 느끼지 않으려 했다. 오빠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싶었다. 내 '사랑'을 가져간 대상을 파괴해 버리고 싶었던것 같다. 그래야 나만 슬프지 않게 되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오빠가 받고 싶은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오빠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오빠가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했다. 어깨너머로 오빠가 좋아하는 IT, 과학, 심리학 등을 따라 관심을 가지다 보니 오빠가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생겼다. 지금은 미술, 문학,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나만의 관심사와 취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세계가 생기고 나니 오빠를 어린 시절처럼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오빠가 가진 것은 그것대로 내가 가진 것은 내 것대로 인정하게 되었고 우린 좀 더 담백한 사이가 되었다.
질투, 잃고 싶지 않아 방어 하는 마음
몇 년 전 한 동료가 내가 기획한 프로그램이 좋다며 자신이 써도 되냐고 물었다. 거절하지 못하고 허락해 주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동료가 내 프로그램 더 멋지게 활용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만든 것을 가지고 사랑받는 것이 싫었다. 지인은 내가 가진 것을 좋게 평가하고 자신도 사용하고 싶은 선망의 마음이었겠지만 나는 내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낀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안한 마음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 쌓아 온 기쁜 경험이 생겼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의 밀도 있는 교류를 나누면서 새로운 경험들이 많이 생성된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디어의 소유권에 집착하는 일이 덜해졌다. 내게 역량과 경험이 생기고 나니 내 것을 뺏긴다는 것에 대한 위협을 덜 느끼게 된 것이다.
내가 충분한 기쁨을 경험하게 되면 직접적인 물질 자체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역량에 대한 확신이 쌓일 때, 그 과정에서 기쁨의 경험이 쌓여 갈 때 그만큼 질투로 인한 불안은 줄어들게 되었다.
질투, 사랑의 그림자가 아닌 자기애의 민낯
내가 가진 것을 부러워했던 이가 있었다. 내 이야기에 그의 얼굴은 얼굴은 슬퍼지곤 했다. 그는 내가 가진 것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결핍이 앞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상황이 점점 부담스러워졌고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다. 더불어 내 마음도 위축되었다. 나는 내 안녕마저 위협받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를 보존하기 위해 그를 멀리했다.
질투는 사랑의 그림자이기보다는 자기애의 민낯이다. 타인의 행복은 자신의 불행을 확인시켜 주기에 고통스럽다. 그래서 타인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희석시키고자 한다. 친구는 자신의 불행이 확인될까 봐 두려워했고 나는 나의 행복을 뺏길까 봐 두려워했다. 내가 좀 더 강건한 사람이었다면 친구의 흔들림에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걱정은 그만하고 대신 친구의 흔들림을 따뜻하게 안아주었을 것이다.
질투는 슬픔의 도미노다.
나의 질투가 두렵다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무엇을 두려워 했을까?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이 오랜 시간 간직해온 신념인지 새로운 욕망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언가를 잃을까 봐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이 상상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좀 더 강건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질투'라는 단어를 듣고 무서워하며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격렬한 감정에 같이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할 때 곁에서 좀 더 단단히 견뎌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기쁨에서 소외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앞으로 사랑을 욕망할 자신이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남에게 투사시키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고립시켰다. 방에 가두어 두었다. 그렇게 고립된 감정은 가끔씩 문을 열고 나오고 만다. 열등감이라는 얼굴로, 위축이라는 얼굴로, 소심이라는 얼굴로 나타난다. 질투는 또 다른 질투를 만들고 확대 재 생산된다.
마르크 샤갈 <Blue Lovers>, 1914, 판지에 오일
사랑은 질투하지 않는다.
질투 없는 사랑은 없다고 한다. 사랑하는 것은 소중하고, 소중하기에 소유하고 싶어 진다. 소유하고 싶을 때 잃고 싶지 않다는 집착이 생긴다. 하지만 내가 소유한 것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내 몫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면 질투는 어떤 모습을 하게 될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할 때 질투하지 않는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먹고 함께 보고 함께 그리는 일들은 기쁘다. 너도 하면 나도 하고 싶어 지고 내가 함으로써 너에게도 기쁨이 전달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 아이를 누가 예뻐한다고 했을 때도 질투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이가 사랑해 주니 고맙게 느껴진다. 내 아이가 다른 것을 더 사랑하게 될지라도(그리고 그렇게 되겠지만) 함께 했던 시간과 기억이 있기에 상실감에만 빠져있지 않게 될 것이다.
내가 두려움을 느낄 때는 행복을 자신할 수 없을 때 일어난다. 불안하고 위태로울 때 잃고 싶지 않은 악착스러움이 생긴다. 질투는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이 시간과 마음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누군가 놀라워하거나 부러워할 때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쌓아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한발 한발 제대로 디디며 걸어온 흔적들, 머릿속 생각이 아닌 몸으로 행동한 것들, 확신하고 확증된 것에 대해서는 칭찬 앞에 우쭐대거나 또는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내 것을 나누더라도 그것은 줄어들지 않는다. 세포가 갈라져 반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두 개가 되는 것처럼 기쁨으로 나눈 것들은 오히려 확대 재생산된다.
질투 너머의 동정심
스피노자는 질투와 반대되는 감정으로 '동정심'을 언급했다. 스피노자의 동정심은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며, 타인의 불행을 슬퍼하도록 자극하여 변화시키는 한에 있어서의 사랑"이라고 했다. 질투와는 반대되는 정의이다.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지 않고 기뻐하려면 나 또한 기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의 미래를 기쁘게 확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확신을 확증해 나가야 한다.
타인의 슬픔을 같이 슬퍼할 수 있으려면 타인의 불행에 안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타인의 불행에 자기의 상처만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켜내기 위해, 소중한 것을 소중히 대하기 위해서는 보다 힘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같이 슬퍼지지 말고, 슬픔에 무기력해지 말고, 귀찮다고 도망가는 사람이 되지 않고 싶다. 다시는 속절없이, 다시는 허탈하게 소중한 '너'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질투를 품고 아름다움을 향해
질투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질투는 불안과 분노처럼 삶속에 있는 슬픔이다. 모양이 추하다고 해서 막을 수 없다. 맑은 하늘을 바라지만 어두운 하늘을 거부할 수 없듯이 말이다. 나는 질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기보다는 질투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검은 밤하늘이 끔찍하다고 해서 고개를 돌리거나 피하지 말고 밤하늘이 알려주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 내가 결핍된 것, 내가 얻고자 하는 바를 질투를 통해 잘 읽어 내고 싶다. 질투는 내가 슬픔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경고일 테니 말이다.
질투는 욕망이 좌절될수록 강해진다. 반대로 욕망을 성취해 갈수록, 시간과 노력을 들일수록, 온몸으로 바라는 것을 생성해 갈수록 줄어들게 된다. 질투는 나의 슬픔을 자각하게 하고 나를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내 앞에서 흔들리는 너를 이해하게 하고 그런 너의 눈빛도 감당할 수 있는 든든한 품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이 글은 나의 잘못을 책망하는 글도 과거의 인연을 위로하기 위한 글도 아니다. 자책감으로 나의 나약함을 숨기고 싶지 않고 미안하다는 말로 부채감을 쉽게 덜어내고 싶지도 않다. 이 글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한걸음이다. 이 글은 미래를 위한 글이 될 것이다. 미래가 되었을 때, 다시 새로운 '너'를 만났을 때, 좀 더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이 글은 비로소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미래의 '너'를 향해 한걸음을 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