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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Sep 14. 2024

찰나가 모여 나를 이룬다.

주체가 경험하는 것인가?
주체는 경험되는 것인가?

강요배 <팽나무와 까마귀>, 1996, 캔버스에 아크릴, 97X162.2cm


팽나무가 있다. 제주도 해안가에 서 있는 팽나무는 바다 멀리서부터 불어온 바람을 만나고 있다. 바람을 만난 팽나무는 바람의 모양대로 가지가 흩날린다. 나무는 그 채로 바람의 흔적을 몸에 새긴다. 바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람이 가져온 냄새를 맡으며. 팽나무는 찰나의 순간 바람을 느낀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나무와 부딪힌다. 나무의 존재를 느낀다. 바람은 나무를 만나 멈추기도 비껴가기도 스쳐 가기도 한다. 바람은 나무에 자신이 지나간 흔적을 남긴다. 팽나무에는 바람의 흔적이 남는다. 바람에 의해 바람을 느낀다.     

 

팽나무는 바람에 저항하지 않는다. 부러질 정도로 무모하게 저항하지 않는다. 팽나무는 바람을 피하지 않는다. 엎드려 눕는 풀처럼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팽나무는 바람과 만난다. 바람과 상호작용하며 서로의 파동에 흔들린다. 강한 파동에 밀리기도 자신만의 파동으로 견디기도 하며 흔적을 만들어 간다.     


나무는 경험하는 것인가. 경험되어지는 것인가. 팽나무와 바람은 둘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우리의 지각에는 팽나무가 혼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팽나무는 바람과 함께 존재한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팽나무에 흔적을 새긴다. 나무는 버팀과 흔들림을 반복하며 형태를 변형시킨다. 팽팽히 저항하면서도 불어오는 바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바람과 함께 흐른다. 나무는 찰나의 순간마다 바람을 경험하고 그 무수한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팽나무를 이룬다.      


나무와 바람의 관계는 계속된다. 나무의 변형은 매 순간 이루어진다. 바람이 부는 한, 나무가 살아 있는 한 계속된다. 그 변형은 나무의 나이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무가 바람을 만난 찰나의 경험은 나이테가 되어 겹겹이 쌓여 간다. 찰나의 순간이 쌓여 오늘의 나무가 되었고, 그리고 미래의 나무가 되어갈 것이다. 나무가 죽어서도 나무의 변형은 끝나지 않는다. 나무가 남기고 간 껍질, 열매, 잎사귀 등이 바람에 날리며 변화는 곳곳에서 영원히 일어난다. 찰나의 순간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미술관에 가면 끌리는 작품이 있다. 그런 작품을 발견하면 내가 작품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작품이 나를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때 그 작품을 보는 것은 분명 나이다. 그리고 그 작품을 나의 경험을 통해 보게 된다. 하지만 어떤 작품은 나의 경험을 압도한다. 내 경험을 고집부리지 않게 만든다. 작가의 세계가 나를 덮쳐 버린다. 그러고 나면 나의 내면은 변화된다. 찰나의 마주침이 내게 새겨진다.

     

어떤 작품 앞에서는 갈등하고 괴로워진다. 내 마음을 어지러이 불편하게 하는 그림이 있다. 당최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미적인 감동도, 의미의 이해도 찾을 길 없는 그림 앞에서 아주 답답해진다. 이 모호함과 불편감을 견디며 작품 앞에 머문다. 이 불편감을 10초 컷으로 끝낼 수도 10분을 바라볼 수도, 1시간을 사유할 수도 있다. 내가 작품의 파동을 느끼고 견디고 이해하려 노력은 10초, 10분, 1시간이라는 다름을 만들고 그것에 따라 내게 남기는 흔적은 모두 다르다. 내가 어떤 찰나와 마주치냐에 따라 어떤 밀도와 강도로 상호작용하냐에 따라 다르게 내가 변형된다.

     

나와 비슷한 파장과 만날 때는 나의 에너지가 더 크게 확장된다. 나와 다른 파장이 만날 때는 나도 너도 아닌 다른 것으로 변형되면서 확장된다. 그 파장을 느끼려고 할 때, 지금, 이 순간 그 파장을 포착하려 노력할 때, 그 순간 나는 현재 있으며 나를 의식하지 않게 된다. 내가 너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역동에 주의를 집중할 때 나를 잊게 된다. 그리고 너도 잊는다. 너와 나 사이의 움직임만이 있다. 이때 나는 경험하는 주체이면서 경험되어진다. 찰나의 순간에 머물면서도 경험을 통해 진화한다.

    

오감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대상뿐 아니다. 기억 또한 경험하며 경험된다. 기억을 쓰는 감정글쓰기 수업에 참여했을때의 일이다. 기억에 관해 기술할 때 나의 몸은 기억을 받아적는 도구가 된 것처럼 느낀 적이 있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내게 빙의되어 내가 과거의 말과 행동을 기술할 수밖에 없도록 조종당하는 기분이었다. 현재의 내 몸이 언어라는 규칙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일부 통제하기는 했지만, 당시 내 몸은 과거의 기억 속에 점령되었다. 하지만 내 몸은 과거에 있지 않고 현재라는 찰나에 존재한다. 과거의 정신과 현재의 몸 사이에는 연속적인 확장이 때로는 불일치와 갈등이 발생한다. 나는 그 불일치를 조정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여전히 현재를 통해 과거와 만난다. 현재 속에서 과거를 경험하며 그 불일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과거와 현재의 내가 만나는 사건 속에서 변형되어 가는, 경험돼 가는 과정을 온몸으로 겪고 있다.  

    

나는 지금을 살고 있지만 과거에 의해서도 살아가고 있다. 그 둘 사이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과거,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을 나이테를 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 그 나이테 속에는 바람의 흔적이 있다. 기쁨과 슬픔이 있다. 동시에 새로운 나이테가 생성되고 있다. 앞으로 그렇게 계속 변화되어 갈 것이다. 나는 찰나를 경험하기도 하며 경험되기도 하는 주체로써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온몸으로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바람의 결과 함께 흔들리며 살아갈 것이다. 나는 바람의 흔적이 새겨진 나무가 되고 싶다. 바람을 만난 매 순간을 품고 있는 나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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