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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Nov 16. 2024

사랑, 너의 고통을 먹는 것

너가 날 걱정해 주는 것이 좋았어


근래 가슴이 찌릿 거리는 증상이 생겼다. 건강검진을 제때 챙기지 못한 지 몇 해가 되었다. 건강에 대한 염려와 함께 가슴에 대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윗 가슴이 차다. 이를 알아챈 사람은 엄마가 유일하다. 초등학교 시절 체기가 있어 학교를 조퇴하고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엄마는 병원 의자에 앉아 내 배를 문지르기도 하고 가슴도 쓸어내리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차니?" 그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던 엄마 표정과 말투가 좋았다. 내 생각을 하며 어두워진 엄마의 낯빛이 좋았다. 사랑받는 기분이 들었다.


아플 때는 몸이 힘들기도 했지만 한편 마음은 좋기도 했다. 감기라도 걸려 아픈 날은 모든 의무가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되었고 TV 만화도 실컷 보면서 뒹글거릴 수 있었다. 아플 때는 더 아픈 거처럼 응석을 대놓고 부릴 수 있었다. 아플 때는 약한 것이 허락되는 몇 안 되는 기회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난 후 그날,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리고 몰래 울고 있는 내게 엄마는 소리 없이 다가왔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이불속에 덮인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가... 힘드니?"라고 한 적이 있다. 그날의 그 목소리가 왜 내 몸에 생생하게 각인되었는지 이제 알겠다. 나는 누군가 내 걱정을 해줄 때 사랑을 받는다고 느낀다. 말로만 하는 게 아닌, 내 걱정을 하며 핼쑥해진 얼굴을 보면 나를 사랑한다고 느낀다. 내 고통을 먹어 상한 얼굴을 보면 사랑을 느낀다. 그렇다. 나는 나의 고통을 먹은 이의 눈물과 한숨을 먹으며 자랐다. 타인의 고통을 먹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너를 위해 흉한 모습도 견디고 역겨운 것도 먹는 것이 사랑이다.



난 그렇게 사랑을 배웠어


타인의 고통을 먹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대개 타인의 고통 앞에 자기 앞의 먹을 것을 탐식하곤 한다. 타인의 슬픔을 보며 자기 설움이 생각나 눈물이 터지는 사람을 보았다. 타인의 슬픔을 보며 그 정도는 아파할 것이 못된다며 자기 슬픔의 무게와 정도를 재는 사람도 보았다. 너의 슬픔을 나의 것과 비교하게 되면 너의 슬픔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것이 그토록 많은 위로의 말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이다.


진정 타인의 슬픔을 보는 이들은 자신의 슬픔을 무화시킨다. 너의 슬픔을 먹기 위해 자신의 슬픈 기억은 없는것이 된다. 자기 자신은 오로지 너의 고통을 먹기 위한 몸, 오로지 너의 슬픔을 느끼기 위한 감각체로 존재한다. 너를 위해 아파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너에게 빌려주는 일이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사랑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랑하는 이가 크게 다쳐 내게 나타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나는 그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처음에는 그런 그의 모습에 놀랄 수 있다. 하지만 부상을 입고 아파할 것을 생각한다면 눈을 돌릴 수 없다.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하기 위해 돌보고 보살필 것이다. 홀로 통증을 겪는 외로 밤을 보내지 않도록 할 것이다. 겉모습이 어떻더라도, 흉하더라도, 무섭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너의 고통을 안아주는 것, 너를 위해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것, 너에게 나를 빌려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사랑을 배웠다.




나는 그리운 것이 되기로 했어. 그리운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해


나도 한때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 착각한 적이 있었다. 핏기가 없는 너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 그 창백함은 나를 질식시켰다. 나는 그런 네가 미웠다. 징그럽고 무서웠다. 이제는 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못했다. 나는 너의 고통을 감당할 역량이 없었다. 내 심장을 너에게 모조리 주고 싶지 않았다. 너와 함께 울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그때의 너를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바다에 나를 홀로 남기고 갔던 너를 이해한다. 나를 무서워했던 너를 이해한다. 나를 보며 자신의 고통에 신음하던 너를 이해한다. 연약했던 너를 이해한다. 그날의 너를 용서할 수는 없을지라도 내등 돌린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너 그때 정말 힘들었던 거구나. 너에게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거구나. 그것도 모른 채 나를 받아 달라고, 나를 들여보내 라고 어리석게도 애원했던 거구나. 무서웠겠다. 두려웠겠다. 그리고 죄책감에 괴로웠겠다. 소리 없는 괴성을 지르며 멀리 도망치던 너를 이제는 원망 없이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너를 이해하는 동시에 나의 어둠에 대한 미움에 크기도 작아지게 되었다. 나의 어둠을 과도하게 책망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 시절 나는 다만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을 뿐, 그날의 일은 너의 잘못도 그리고 나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사랑하지 못했다는 씁쓸함만 남을 뿐이다.


나의 가슴을 쓸어주던 엄마가 그립다. 나의 고통을 대신 먹어주던 엄마가 그립다. 서러움 파도처럼 찾아왔다 쓸려나가며 그리움을 남긴다. 엄마는 나의 그리움이다. 엄마는 나의 사랑의 원형이다. 그런 엄마의 기억을 찾았다. 이제는 내가 엄마가 되어야겠다. 이제는 내가 그리운 네가 되어야겠다. 그리운 너로 살아가야겠다. 차가운 너의 가슴을 쓸어내려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사랑의 기억을 이어가고 싶다. 그렇게 그리운 너를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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