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어렵다
위로는 슬픔에 빠진 '너'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경험해 보지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쉽게 마음을 전하기 어렵다. 그 슬픔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예기치 못한 상실을 경험한 경우, 내게 그런 경험이 없다면, 슬픈 이 앞에서 입을 떼기 어렵다. 내가 비슷한 불행을 경험했더라도 위로가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이미 그 슬픔의 터널을 지나왔다면 슬픔 속의 있는 이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비슷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이미 불행했던 그 사건이 객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슬픔과 거리를 둔 상태에 있지만 상대가 슬픔의 한가운데 있다면 나는 결이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그의 필요에 맞는 것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라도 마음만 가지고서 덤벙덤벙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된다. 상대가 슬픔을 겪고 있는 상태라면 그의 마음은 여리고 약해 있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나의 미숙함을 이해해 달라고 어리광을 필수는 없다. 최대한 내가 세심히 살펴 그를 따뜻하게 돌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좋은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
위로란 무엇인가
먼저 위로의 뜻부터 보자. 위로의 사전적 의미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줌"이다. 위로의 목적은 상대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에 있다. 그 목적에 따라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해야 할지 정해진다. 상대가 울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같이 울어주고, 상대가 돈이 필요한 상황이면 돈을 보태 주고, 상대가 다정한 말이 필요한 상태라면 보드라운 말이 적힌 편지를 적어주는 것이다. 상대가 자신의 슬픔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함께 머물러 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위로를 할 때 가장 큰 실수는 어떤 말이나 어떤 행동을 할지를 먼저 생각하면서 생긴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무엇이 필요한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네가 알고 있는 필요,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네가 알지 못하는 필요를 살피려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이토록 위로는 고단한 일이다. 위로를 해주고 싶다면 이 고단한 과정을 감당해야 한다.
위로(慰勞)로의 한자는 위할 위(慰), 일할 로(勞)이다. 위하다(慰)는 것은 상대를 소중히 여기고 이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 위하는 일을 노동처럼 애쓰며(勞) 하는 것이 바로 '위로'인 것이다. 위로는 상대를 이롭게 하기 위해 애쓰는 노동인 셈이다. 위로는 오로지 '너'를 돕기 위한 '나'의 노동이다. '너'를 이롭게 하기 위한 '나'의 헌신이다. '너'를 위해 나의 자리에서 너의 자리로 세계를 이동해야 하는 일이다.
대상이 혼란스러운 위로
너를 위한다고 하면서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위로하는 일은 허다하다. 위로의 주체와 대상이 뒤섞여 버리는 것이다. 장례식을 치르다 보면 다양한 위로를 받게 된다. 몇가지 기억나는 사례가 있다. 하나는 장례식이 끝나고 난 후 받은 전화였다. 보통은 부고를 듣지 못해 찾아가지 못했다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를 책망하는 친구도 있었다. 연락을 줬으면 갔을 텐데 왜 말하지 않았냐며 서운해 했다. 나는 말하지 못한 사정을 변명처럼 말해야 했다. 연락을 받지 못한 그 친구가 서운해하지 않도록,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의 슬픔에 연대하고 싶은 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나의 경솔함을 사과해야 했다.
어떤 친구는 나보다 더 서럽게 우는 경우도 있었다. 편찮으신 부모님 걱정이 된다면서 내 일이 자기 일처럼 느껴진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자신의 불행한 사건이 떠올라 그 하소연을 하기에 여념이 없기도 했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죽음,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떠올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나 조차도 마찬가지다. 나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울지 못했다. 혼자 남은 나, 후회로 가득찬 지난 시간을 견딜 수 없어 서럽게 우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온전한 위로는 장례식에서 조차 어려운 일이다. 자기 슬픔이 가득한 상태에서는 타자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오직 너를 위한 위로
그럼에도 기억에 나는 위로가 있다. 서른 중반에 갑작스럽게 상주가 되었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장례식에는 나보다 나이가 몇 살 아래인 회사 직원이 문상을 왔다. 자그마한 체구에 여리게만 보이던 그녀는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절차를 능숙하게 해냈다. 또래 젊은이들처럼 쭈뼛거림도 없었다. 그녀는 테이블 한편에 앉아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대학생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였다. 장례식날 너무도 황망하여 울지도 못했다고 했다. 장례식날의 기억은 까맣게 지워졌다고 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간 후 갑자기 까만 자리에 구멍이 생겼다고 했다. 그 구멍이 너무 쓰리고 아파서 견디기 어려웠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그 직원을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눈빛과 태도는 단호히 말했다. '아니에요. 나를 위로하려 하지 말아요. 나는 언니를 위해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요. 내일은 오늘보다 더 슬플지 몰라요. 너무 놀라지도 말아요. 그 힘듬도 시간 속으로 사라져 가요. 어쩌면 익숙해져 가는 것인지도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처음으로 입을 연다던 그녀의 붉어진 입술, 기억을 더듬으며 이따금씩 흐려지는 눈동자, 올라오는 무언가를 참으려는듯 두손을 꽉 맞잡고 있는 그날의 그녀를 잊지 못한다. 나를 위한 그녀의 노동을 잊지 못한다.
위로는 어쨌든 위로
과연 오직 '너'만을 위한 위로만이 진짜 위로일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가짜 위로도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 나의 서러움에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친구가 있어서 좋았다. 그것이 나의 서러움에 우는 것이던, 아니면 자신의 서러움이 생각나서 우는 것이든 간에 그저 우리가 함께 울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이성적인 해결책 보다도, 그저 나를 가엾게 여기는 사람, '어머머!' '어쩌면 좋아!' 하며 연신 혀를 차며 감탄사 밖에 내뱉을 줄 모를지라도, 나의 곤경에 같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 나만 이렇게 나약한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내가 위로받았다면 나의 괴로움이 덜어졌다는 의미다. 나의 괴로움은 내게 위로를 준 이가 함께 짊어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위로를 받았고 내 짐을 누군가에게 뻔뻔하게 맡겼다.
하지만 내가 슬픔의 늪에서 빠져나오고 보니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더 이상 그들과 같은 문제로 허우적거리게 되지 않게 되자 함께 슬퍼하던 이들은 나의 행복을 순순히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샘을 내고 질투했다. '아니야, 너도 힘들잖아. 실은 너도 연약하잖아'라고 속삭이며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나를 계속 끌어당겼다. 그 방식은 시기심으로 공격하기도 했고 묘한 죄책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슬픔의 연대는 강렬하고 잔인하다. 네가 슬픈 것만으로도 나의 슬픔은 위로가 되니 말이다.
나는 한때 나를 살리던 슬픔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끊어 내려고 했다. 함께 슬퍼하자는 사람들의 손을 억지로 떼놓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날 잡아 끄는 것 같아 밉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이 모든 불펴감은 내가 연약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슬픔의 기운을 억지로 떼어내고 싶은 것도 슬픔의 무게가 견디기 어려워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그들이 슬픔의 싫었던 이유는 나의 슬픔이 감당이 되지 않았던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그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진짜와 가짜를 따지는 동안 나에게 보낸 그들의 진심을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위하는 마음이 순도 100%는 아닐지 몰라도, 그 속에서도 진심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그들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였으며, 그 전부를 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전한 위로
이따금 상실한 것이 떠올라 슬픔이 차오를때가 있다. 한 친구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걱정했다. 그 걱정스러운 얼굴에 미안하게도 나는 슬프지만은 않았다. 상실감은 '없음'에서 생기는 마음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있음'이 있기에 생기는 마음이다. 그 '있음'이 무엇인지 안다면 '있음'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이전과 같은 모양이 아니더라도, 내가 원하는 한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안다.
이전 같으면 나는 친구의 반응에 쓸쓸해졌을 것이다. 정확하게 나를 읽지 못하는 것이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 슬프지가 않았다. 내 마음을 정확히 읽지 못한 네가 신경 쓰이기보다, 내 마음에 더 크게 흔들렸을 너의 마음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진동으로 더 크게 흔들렸을 너의 마음에게 미안해졌다. 그리고 나를 위해 너의 마음이 흔들려 준 것이 고마웠다. 나로 인해 너의 전부가 흔들린 것이니 말이다.
가짜 위로, 진짜 위로는 없다. 위로를 하려는 이는 자신이 아는 한,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려 하기 때문이다. 위로를 아는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받을 수 있다. 말이나 행동이면의 보이지 않는 진심을 알기에 위로를 느낄 수 있다. 위로는 위로가 필요 없는 순간에야 찾아온다. 사랑에 의존하지 않아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함께 있을 수 있다. 위로를 받고 싶다.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날. 온전한 위로를 느끼고 싶다. '너'가 나에게 건네주는 호의를 온전히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