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 2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갔다. 시장길을 걷고 있는데 좁은 골목 안으로 눈과 코를 찌르는 최루탄 연기가 뿌옇게 새어 들어왔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상가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우당탕탕 거리는 소리와 함께 골목 안으로 도망쳐 들어오는 시위대와 전투 경찰이 보였다. 시위대는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전투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끌려갔다. 더욱 놀라왔던 것은 그다음이었다. 시위대가 끌려가는 걸 본 주변에 있던 한 젊은 남자가 갑자기 먼저 끌려간 남자와 비슷한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얇은 회색양복 차림에 손에는 007 가방을 든 말쑥한 차림의 직장인으로 보였다. 그의 구호를 듣자마자 함께 온 다른 전투 경찰 한 명이 방향을 틀어 그의 얼굴을 곤봉으로 가격했다. 양복을 입은 남자의 얼굴에서 검은 뿔테 안경이 떨어져 나갔고 그의 머리에서는 붉은 피가 흘렀다. 전경은 피떡이 된 그를 질질 끌고 갔다. 나는 너무나 놀라 숨을 쉴 수 없었다. 매 쾌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기침하나 나오지 않았다.
양복은 입은 젊은 남자는 전경에게 끌려가면서 기죽지 않고 소리쳤다. 무언가 시위의 이유인 듯한 그 말을 계속 토해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은 곤봉을 내리쳤던 전경도, 피를 흘리는 남자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의 외침이었다. 그 참혹한 순간에도, 그 공포스러운 순간에도,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가던 길을 모른 채 가지 못하고, 곤봉에 맞을 것을 알면서도 청년은 왜 시위꾼의 주변에서 구호를 외칠 수밖에 없었던 걸까? 그가 위축되지 않고 그토록 당당히 소리칠 수 있었던 힘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30년쯤이 흘러 눈치 빠른 직장인으로 살고 있을 때였다. 당시는 광우병 수입 반대로 시위가 한창인 때였다. 당시 나는 인터넷 VOD서비스의 편성을 담당하는 팀에 근무하고 있었다. 관리자는 광우병 관련 영상은 모두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법적인 문제나 더 윗선의 지침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얻어맞기 전에 미리 몸을 웅크려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자체검열이 시작된 것이다. 팀원들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공개적으로 토를 달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문제의 소지가 될지도 모를 티끌 같은 가능성으로 그 서비스를 중단시켰다. 수치스러웠다. 무기력을 느꼈다.
얼마 뒤 MBC에서 대대적인 파업을 했다. 광우병을 보도했던 PD수첩 관계자들은 검찰 조사를 받았고 언론을 통제하려 했다. MBC는 이에 대한 저항으로 대부분의 방송이 제작을 중단했다. 예능 PD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TV에서는 볼게 없어졌다. 즐기고 놀 거리가 없어진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유튜브 방송을 볼 수 없게 된 그런 심리적 상태였다. 직장 상사가 점심을 먹으며 내게 물었다. "MBC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나의 정치석 성향을 묻는 질문이었다. "파업이 끝나야죠." "그러니까 너는 어느 쪽인데?" "저는 무한도전을 보고 싶어요. 그뿐이에요" 나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 내가 즐기는 프로그램을 보고 싶었다. 무한도전이라도 보며 웃고 싶었다. 그래야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몇 년 뒤 아이는 유치원생이 되었다. 메르스 질병으로 유치원 등원이 중단되었다. 낙타가 옮겼다나 뭐라나 하는 질병인데 그 질병이 엄청 무서운 거라고 했다. 질병을 예방하는 방법은 낙타고기를 먹지 않을 것, 중동지역에 여행가지 말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유치원은 물론 놀이터에도 나갈 수가 없었다. 추운 겨울에도 더운 여름밤에도 흥행하던 동네 놀이터에는 인기척이 사라졌다. 그때 알았다. 정치는 바로 내 삶이었구나.
그리고 얼마 뒤 광화문에서 촛불시위가 한창 불타오르고 있었다. 뉴스를 보며 남편과 광화문에 나가야 할지 말지 이야기를 나눴다. 한 사람이 집을 비우면 독박 육아가 되어 힘들고, 그렇다고 추운 겨울날 애를 데리고 나가기도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집회 주체 측에 후원금이라도 보내며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탄핵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우리 부부는 가끔 그날 일을 이야기한다. 그때 광화문에 나갔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며 그때 함께 추위를 견디지 않은 것에 대한 부채감이 생겼다.
지난 12월 3일, 저녁 늦게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계엄뉴스를 듣게 되었다. 옛날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고 공포감이 들었다. 자유를 잃을지도 모른다. 내 일상이 파괴될지도 모른다. 나는 또다시 부끄럽게나 무기력해질 수 도 있다. 불안이 엄습했다. 나는 이제야 40년 전 그날, 가던 길을 멈추고 위험을 자처했던 그 남자의 행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외쳤던 구호가 무엇이었는지. 그가 무엇을 지키고 싶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시장 골목 상가에 몸을 숨긴 한 젊은 엄마와 어린아이의 일상을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보고 즐기려 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을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놀이터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싶은 어린이들의 일상을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안심하고 아이를 키우고 싶은 한 가정을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40년 전 어린아이는 자라 그 남자보다 많은 나이의 중년이 되었다. 상황을 판단할 줄 알고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이제는 내가 어린아이를 지킬 차례이다. 이름 모를 시민이 지켜준 소중한 일상을 내가 지키고 유지시킬 때이다. 40년 전 그에게서 선물 받은 소중한 일상의 대가를 지불할 때가 되었다. 나도 그날의 그 남자를 따라 거리로 간다. 소중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