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부터 기묘한 느낌의 어지럼증과 갑작스러운 시력 저하가 생기면서 신체 기능이 조금씩 소실되어 가는 것을 실감했다. 막연했던 나의 죽음이 더 가까이 느껴졌다. 만약 내가 소생이 불가능한 병에 걸린다면 다가올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내가 아는 죽음
엄마는 소뇌위축증으로 8년간 고생하셨다. 소뇌는 운동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인데 소뇌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운동기능이 실조 되는 병이다. 소뇌는 걷고 뛰고 움직이는 전형적인 운동 외에도 숨 쉬고 침을 삼키고 먹고 씹고 말하는 등 삶에 필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소뇌위축증은 운동과 관련된 그 모든 기능이 소실되는 병이다. 보통은 와병 상태로 누워있다가 사망하게 된다. 엄마는 집에서 균형을 잘 잡지 못하고 넘어지면서 병세가 심각하게 악화하였다. 약 6개월 정도 병원에 누워계셨고 돌아가실 때 직접적 사망 원인은 기도 막힘으로 인한 호흡곤란이었다. 가래가 목에 걸려 돌아가신 것이다.
소뇌위축증은 산발적이기도 하고 유전적 요인이 있기도 하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유전성이 있을 수 있으니 자녀들도 검사를 받는 게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검사를 받는다고 해도 치료제가 없는 병이기에 아버지는 너무 충격을 받으셨고 그 말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비밀로 하셨다. 당시에는 그 말을 들으며 우리는 건강하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시켜 드렸고 곧 그 말을 잊었다. 당시 나는 젊었고 죽음은 더 먼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의 그 과도한 걱정이 얼마 전 뇌리를 스쳤다. 내 나이가 곧 50세이고 엄마는 60세에 병이 시작되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나도 몇 년이 남아있을지 알 수 없다. 엄마가 내 나이에는 10년 뒤 병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도, 몇 년 살지 못하고 숨이 막혀 갑자기 죽게 될 것도 상상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도 그때의 엄마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뒤가 서늘해졌다.
아버지께서는 몇 년간 암 투병을 하셨다. 항암은 주사제를 사용했으며 종류는 대여섯 가지를 사용한 것으로 기억한다. 매해 새로운 종류의 항암제를 쓴 셈이다. 처음 두 번은 임상 사례가 많고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약을 투약했다. 처음에는 약에 반응했지만, 항암이 끝나고 휴약기가 되면 다시 암 수치가 올라갔다. 의료보험이 가능한 약이 끝나고 난 후에는 임상 시험 기간에 있는 신약을 투약했다. 임상 기간에 있는 약을 사용하면 치료비 지원이 되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항암치료를 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다시 항암 수치가 올라갔고 우리 가족은 비용 지원이 없더라도 병원에서 권한다면 신약을 투약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병에 대항하는 방법은 오직 항암치료뿐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다. 항암의 부작용을 알면서도 항암의 부작용을 겪으면서도 할 수 있는 선택지가 당시로서는 그것뿐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항암치료를 하셨고 체력적 부담으로 힘들어하셨다. 암 환자가 항암치료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많은 사람에게 검증된 것, 흔히 하는 것이었기에 별 고민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밖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정말 다른 선택지는 없을까?
또 다른 죽음
예전에 라디오에서 MBC 이용마 기자의 생전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용마 기자는 복막암이라는 희소한 암을 진단받았다. 검증된 치료 방법이 없었기에 비슷한 질병에 사용한 약물로 항암치료를 했다고 한다. 이용마 기자는 말기에는 항암을 중단하고 대신 글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공영방송 정상화 운동에 참여했다. 이용마 기자는 죽음 앞에서도 명료한 정신을 가지려고 노력했고 사랑하는 어린 자녀를 위해 아버지의 삶을 글로 남겼다.
당시에 이용마 기자의 인터뷰를 들으며 항암치료 중단을 결정까지 얼마나 고되고 외로웠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 역시 상상할 수 없는 현실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그 준비를 미룰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가 엄마와 같이 모든 운동기능을 상실하는 질병을 겪게 된다면, 만일 내가 아버지와 같이 여러 번의 항암치료에도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지쳐가고 있다면 나는 내 문제를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나 스스로 지각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 죽음 앞에서도 명료한 정신으로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여러 죽음을 떠올리면서 죽음이 내게 '다음은 네 차례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할수록, 가까이 느낄수록 무섭기보다도 더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년 같은 10년을 살고 싶었다. 3년 같은 1년을 살고 싶었다. 한 달 같은 하루를 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은 하루하루를 좀 더 깊이 있게 만들었고 망설이던 것들을 하나씩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작은 순간이 정말 감사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점점 죽음이 임박해 온다면 소망컨대 죽기 직전까지 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남아있는 자들이 너무 크게 상처받지 않는 방식으로 이별을 준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나의 상실을 크게 슬퍼하지 않도록 준비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그 이별이 완전히 준비되지 않더라도 때에 따라서는 결단을 내려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작은 죽음을 맞이하며
생물학적 죽음이야 언제인지 알 수 없고 내 나이에는 아직 먼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일어난다. 생명이 끝나는 죽음만큼 큰 사건이 아니더라도 그보다는 더 약하지만 수많은 죽음의 사건은 매일 일어난다. 하루는 작은 죽음이며 하나의 인연이 끝나는 것 또한 죽음이다.
나는 인연을 어떻게 맞이하고 어떻게 떠나보내고 있는가? 끊어진 인연에 인공호흡기를 달고 진통제를 주입하며 연명치료를 했던 적이 여러 번 있다. 나를 보며 힘들어하는 것을 더는 보지 못해 스스로 인공호흡기를 떼버린 적도 있었고, 누군가의 인공호흡기를 내 손으로 떼어야 할 때도 있었다. 나는 쉽게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잘 떠나보내지 못한다.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는 죽음을 원하면서도 죽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고, 가족들은 그를 보내 줄 수 없다. 그렇게라도 곁에 머물기를 원한다. 그렇게라도 곁에서 숨쉬기를 원한다. 집착인 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진정으로 ‘너’를 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진정으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헛웃음이 난다. 하나의 인연과도 자연스럽게 만나고 이별하지 못하면서 죽음이라는 큰 사건을 감히 떠올렸다. 나는 아마 내가 봐온 대로 그렇게 죽을 거다. 지금도 나는 모든 결정을 의사(제도, 관습, 상식)에 맡기고 진통제와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자. 이별의 상처로 너무 고통스럽지 않게 이별을 준비시켜야 한다. 잘못한 것을 고백하고 용서할 것을 용서하며 다툰 이들과 화해하고 싶다. 고마웠던 마음을 온전히 전하며 작별하고 싶다. 설사 준비가 생각만큼 되지 않더라도 결단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런 준비를 미처 하지 못한다면 남겨진 ‘너’의 슬픔까지 가지고 가는 수밖에 없다. 생이 남아있는 한, 연이 이어지는 한, 할 수 있는 만큼을 다 하고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나는 죽음을 연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