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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un 15. 2023

따뜻한 무관심

   새 한 마리가 인도 위에 서성거렸다. 내가 발걸음을 가까이 옮길 때마다 새는 종종거리기만 했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푸른 회색빛이 도는 뻐꾸기였다. 새는 내 발이 다가갈 때마다 조금씩 종종 걸음으로 도망을 갔다. 새는 내가 다가가는 만큼 멀어지다가 기어이 도로로 들어가 버렸다. 새는 날지 못했다. 새를 도와주고 싶었다. 새를 손으로 안아 보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새는 점점 도로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아. 안돼! 아, 가지 마!     


저 멀리서 차 한 대가 오고 있다. 운전자가 도로를 향해 안절부절못하는 나와 그리고 새를 보았다. 차는 중앙선을 침범해서 반대편 차선으로 크게 돌며 새를 피했다. 그 순간 알았다. '아, 나도 새를 피해야 한다.' 새를 사지로 몬 것은 바로 나였다. 새는 나를 피해 도로로 도망을 갔던 것이다. 나는 가던 길을 그냥 무심히 지나갔다. 잠깐 뒤를 돌아보며 살피자 새는 위협이 사라진 길을 가로질러 풀더미로 들어간다. 새는 마음 놓고 자신을 돌볼 수 있는 보금자리로 들어간 갔다. 새를 피하는 것이 새를 돕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 그것이 때론 위협일 수 있다. 자동차 운전자의 목숨을 건 방어가 아니었다면 난 무례한 아니 폭력적인 관심을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아찔하다.




파울 클레 <고양이와 새>, 1928


   관심이 때론 얼마나 폭력적인가. 사춘기 아들의 이야기다. 아들은 혼자 있고 싶은 순간이 부쩍 많아졌다. 아직도 잠자리에 들 때면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하며 퇴행하기도 하지만 혼자만의 감정에 빠지고 싶은 순간이 많아졌다. 내가 관심을 가질 때마다 아들은 벽치기를 하곤 한다. “들어오지 마! 혼자 생각할 게 있어.”    

얼핏 봐도 얼굴이 상해 돌아오는 아들이 너무 걱정되는 날에는 방문을 확 열여 젖히고 따라 들어가 무슨 일인지 묻고 싶기도 하다. 다짜고짜 들어가면 대화가 분노의 연료를 태우며 안드로메다로 갈 것이 뻔하기에 문 앞에서 답답한 마음을 안고 서성거리곤 한다. 학령기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 상담을 하다 보면 대화를 거부하는 아이의 방문을 따고 들어갔다거나 혹은 방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 싫어서 문짝을 아예 떼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다. 처음에는 그 부모의 과격한 행동이 초래하는 부작용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내심 그 문을 따고 들어가는 부모의 심경이 어땠을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에게 '방'은 자기만의 세계이다.     


이 방은 너무 작지 / 그래 나의 꿈을 담기에 / 침대 그 위로 착지 / 여기가 제일 안전해 / 어쩜 기쁨도 슬픔도 어떤 감정도 / 여긴 그저 받아주네 / 때론 이 방이 감정의 쓰레기통이 돼도 / 날 안아주네 /
BTS, <내 방을 여행하는 법> 

    

    BTS 노랫말 에서의 '내 방'은 자기만의 세상이다. 나를 안아주고 나를 보호해 주며, 홀로 된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방이다. 그 방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방문을 벌컥 여는 행위는 허락 없이 옷을 벗기는 것처럼 폭력적인 일이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상태라면 자신을 스스로 치유할 능력이 있다. 오늘 길에서 만난 뻐꾸기처럼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 스스로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바로 친밀한 타인이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때론 가족이다.  

   

이는 부모-자녀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우리가 타인과 관계할 때 쉽게 일어나는 폭력적 관심이기도 하다. 관심을 보일 때 고민해야 한다. 내가 가까이 다가설 때인가 물러설 때인가, 아니면 지켜보고 서 있을 때인가를 말이다. 이것이 판단되지 않으면 다정함은 폭력이 되고, 관심은 무관심보다 못한 일이 돼버린다. 때론 침묵이 큰 관심의 표현수단일 수도 있다. 도움이라는 명분으로 애타고 안타까움에 불안해진 내 감정을 해소하려 해서는 안 된다. 상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고 실행할 수 있는 인내와 신중함은 가장 진지한 관심이며 따뜻한 사랑의 행동이다.         


   반대로 내가 고통 속에 있다면 알아야 한다. 나 자신도 뻐꾸기처럼 자신을 치유할 힘이 있다는 것을. 타인의 위로나 도움 없이도 나에게 시간을 주고 지켜봐 준다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고독으로써 만들어지는 힘일 것이다. 외로움이 고독으로 승화되는 날 알게 될 것이다. 홀로 있는 것이 주는 의미를. 그때가 되면 난 자연이 주는 힘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새가 다른 동료 뻐꾸기나 인간에게 의지하지 않고, 땅과 숲에 의지한 것처럼, 모든 자연이, 홀로 있는 시간조차 나를 안아주는 방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좋겠다.


파올 클레 <노란 새들이 있는 풍경>,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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