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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과 분별속에서 살아가기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해설 수업 후기 (1)

by 정희주

아이가 어릴 적에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던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아이에게 나쁜 꿈을 꾸었냐고 물어보면 아이는 이상한 말을 했다. 꿈속에서 무언가 써지고 지워지는 장면이 반복된다고 했다. 세상이 커지고 작아지고 자꾸 움직이는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표현했다.


나도 어릴 적에 이와 비슷한 꿈을 꾸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내 꿈속에서는 추상화가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였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장면처럼 기하학무늬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장면이거나 만다라가 움직이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 꿈을 꾸다가 도중에 깨어 우는 날도 많았다. 꿈속 장면이 어지럽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죽을 것 같은 공포였다. 엄마는 우는 나를 업고는 ‘괜찮다’고 얼러주면서 방 안을 걸어 다니셨다. 나는 아직도 꿈속의 괴상한 장면과 꿈을 꿀 때의 느낌, 나를 달래주던 엄마의 ‘쉬이’하던 소리와 따뜻한 등,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다시 편안하게 잠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던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엄마는 내가 심약해서 그런 꿈을 꾼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심약함에 당신께서 일조했다고 죄책감을 느끼셨다. 어릴 적에 엄마가 나를 혼낸 일이 많았는데, 내가 울 때마다 엄마는 자신이 화낸것 때문에 아이가 놀라서 경기를 일으킨다고 생각하셨다



얼마 전 아이가 다시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어릴 적 꾸던 이상한 장면이 또 나왔다고 했다. 나는 아이에게 혹시 요즘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는지 물었다. 나 역시 아이의 추상화 같은 꿈을 악몽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아의 심약함과 나의 부족함이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꿈은 현실에서 경험한 것만 나온다. 어린아이의 꿈에는 어른이 경험하는 세계가 나오지 않는다. 아이는 자신이 겪고 상상한 것만에 꿈속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아이의 꿈속 장면은 언젠가 아이가 경험했던 장면일 수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의 꿈 역시 의식되지 않는 기억의 일부일 수 있다. 이 세계를 형태가 있는 구상으로 인식하기 전, 세계가 상징화되기 전에 보고 느꼈던 세상에 적응하기 전에 경험했던 장면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흔들리는 추상화 같은 꿈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불편하고 어지럽기는 했지만 그저 흔들리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다. 있을 수 있는 흔들림에 내가 ‘악몽’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 정의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은 ‘혼돈’이 되며, ‘혼돈’에 압도되는 꿈은 ‘악몽’이 된다.


신생아 때는 초점이 불분명하고 사물의 배경과 대상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자라나면서 외부 대상을 명료하게 분리해 내면서 시지각이 발달해 나간다. 교육은 대상에 이름을 붙이면서 명료하게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엄마는 컵을 가리키며 “이것은 컵이야”라고 말하면 아이는 컵이라는 언어와 동시에 컵이라는 대상의 테두리를 인식한다. 어릴 때 보았던 흔들리는 세계는 언어라는 강력한 상징적 체계가 더해져 대상이 선명하게 보이도록 테두리를 만들어 준다. 이처럼 언어라는 상징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지각할 수 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아직 언어를 가지지 못한 것들은 어떻게 지각할 수 있을까?


만일 특정 감정을 명명화하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감정이 분명히 무엇인지 테두리를 갖지 못하게 된다. 감정이 뭉텅이처럼 느껴지고, 복잡하게 얽혀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것은 슬픔이야.”, “이것은 두려움이야”라고 명명하며 언어화하지 못했다면, 감정은 혼란스러운 것이 되며 이해하기 어려운 외계어가 될 수도 있다.


그 아이는 커서도 감정이 복잡하고 엉켜있어 불편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불안해하거나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불편한 감정이 일어났을 때는 그 괴로움을 감당할 수 없어 억압하거나 회피하게 된다. 불편한 감정은 특정 사건을 만나 드러나길 희망하지만, 언어가 없다면 이것은 다시 본래의 감정이 드러나길 막는 방어로 반복된다.





나는 세계를 분별하기 위해 여러 방법의 훈련을 받았다. 그 시작은 가정과 학교의 교육이었다. 옳고 그름에 대해 배웠다. 배운 대로 옳은 것은 하고 그른 것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성실하게 살라고 해서 열심히 일했고 착하게 살라고 해서 할 말을 참고 양보하며 살았다. 하지만 기존의 교육으로는 뭔가 찜찜함이 남았다. 정작 중요한 것을 직면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교육받은 대로 살았지만, 왜 행복해지지 않는 것인지, 왜 절망을 겪게 되는지, 왜 불행을 피할 수 없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분명히 명명되지 않은 무언가가 더 있는것 같았다. 간질간질 하고 찝찝했다. 이 불편감은 알 수 없는 불안이 되었다.


철학을 공부하고서부터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조금씩 테두리가 생겼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좋고 나쁨에 대해 말해주었다. 나에게 좋은 것은 선택하고 싫은 것은 멀리 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해 주었다. 철학을 배우면서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처음에는 철학이 나의 삶을 위로해 주고 정당화시켜 주는 기분도 들었다. “철학자가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라고 했어.", “철학자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라고 했어.”. 이런 말들은 마치 나답게 살 권리를 선물해 주는 것 같았다. 내가 테두리를 지각할 수 없을 때 철학자가 내게 그려준 테두리가 좋았다. 그 테두리 속에서 안전함을 느꼈다.


하지만 점차 그 테두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테두리가 흔들리면 불안했고 다시 혼란스러움이 찾아왔다. 기존의 테두리가 다시 흔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내가 인식할 수 있는 테두리 역시 흔들리며 변화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다른 욕망이 생긴다. 무언가를 보고 싶다는 욕망, 무언가를 알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그 욕망은 다시 기존의 테두리를 흔든다. 그리고 새로운 테두리를 형성해나간다.


철학이 삶을 안정시키는 것은 나를 보호하는 테두리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 아니었다. 철학은 나와 세상을 지각하는 테두리를 만들어 주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의 결을 쳐주는 테두리,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을 인식하고 분별할 수 있는 테두리를 만들어 준다. 흔들리는 바다처럼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방향키를 부여잡을 용기와, 바람을 이용할 줄 아는 지혜와, 다른 선원들과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을 알려준다. 내가 테두리를 찾을 수 있는 한, 세상은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다. 흔들림 속에서 형태를 분별해 나갈 수 있다.


앞으로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 세상이 흔들리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것에 ‘악몽’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흔들리는 것이란다. 잘 산다는 것은 흔들림 속에서 균형을 찾도록 애쓰는 것이다. 기쁨이란 생생히 살아있는 감정을 느끼며 내가 있는 세상을 선명하게 지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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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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