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다이세츠 <가르침과 배움의 현상학>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생각이 많다. 몸을 움직이기 앞서 생각을 더 많이 한다. 많이 관찰하고 많이 생각해서 실수를 줄이고 싶었다. 가장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오래 생각하고 때를 기다린다고 생각했다. 믿었던 기다림은 종종 때를 놓쳤다는 후회와 자책으로 돌아왔다. 더 빠르게 준비했어야 했는데, 준비된 것을 펼쳐놓아야 했는데, 용기를 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 후회가 반복될수록 그만큼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며 나의 문제는 단지 '기다림'이 아니었다. 제 때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시간이 남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때 소심해지고, 매듭을 지어야 할 것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제 때를 알아보지 못하는 지혜의 부족이었다. 기다려야 할 때가 있고 다가가야 할 때가 있다. 생각해야 할 때가 있고 말해야 할 때가 있다. 조금 말해야 할 때가 있고 자세히 설명해 줘야 할 때가 있다. 나는 그런 때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이유는 소심함 때문이었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 실수해서 상처 주면 안 된다는 생각, 상처받은 이가 나를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래서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들었다. 섣불리 행동하면 사랑받지 못한다는 공포는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사랑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혼자 남으면 어떡하지?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본 사람만이 아는 공포다. 혼자된 고독을 아는 사람은 불타오른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뜨겁게 움직이다 큰 불에 데인 경험이 있다. 그 상처는 너무 쓰리고 아팠다. 상처는 움직일 때마다 부자연스러웠고 아물지 않은 상처가 욱신거렸다.
이 통증을 다양한 방식으로 극복하려 노력한다. 어떤 이는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상대방이 원하는 사람이 된다. 어떤 사람은 상대를 제압하여 자기 주변에 사람을 붙들어 놓는다. 나는 전자의 사람이었다. 조금 필요한 것을 주고, 조금 원하는 사람이 되어 만일 혼자되더라도 덜 상처받고 싶었다. 덜 움직이면 덜 상처주게 되고, 덜 미움받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덜 움직이면 덜 사랑을 주고, 덜 사랑을 받고, 덜 기쁘게 된다. 무의미한 맹탕이 되고 만다.
쉽게 움직이지 못했던 이유가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라면 그 두려움에 맞서는 방식으로 움직여야 한다. 사랑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너'에게 주의를 기울여, '너'의 자리에 서서, '너'를 위한 방식으로 움직여야 한다. '너'를 생각했을 때 얼마나 언제 움직여야 하는지, 얼마나 많이 움직여야 하는지, 얼마나 오래 움직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너'만이 딱 필요한 만큼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너'가 아니다. 그러기에 나의 생각이 정말 '너'를 위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고민이 따라온다. 내가 아무리 '너'를 위해 움직인다 하더라도 '너'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너'에게 상처 주는 일이 일어나서 나를 미워하게 된다면 그 몫은 당연히 내 것이다. 뒷감당까지 고려된 행동이어야 한다. 하지만 '너'를 위한 '나'의 최선이 '너'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혹은 '너'에게 미치지 못해 정작 너를 돕지 못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서라도 사랑하려 애써야 할까?
깨달음은 나의 체험속에 있다.
"정각은 하나의 눈뜸으로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심장에서 나오는 체험으로 타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식 위에 내면적으로 전개되어 가는 하나의 체험으로, 그 체험으로부터 니르바나의 고향에 도착하려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영원의 조화와 아름다움의 세계가 그것으로부터 창조된다."
- 스즈키 다이세츠 <가르침과 배움의 현상학>
스즈키 다이세츠는 <가르침과 배움의 현상학>에서 '아함경'의 문구를 인용하며 깨달음은 누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에서 나온다고 전한다. 깨달음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오는 것이다. 깨달음은 오직 나의 체험에서만 나온다. 그것은 가볍게 바람을 느끼듯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뜻을 품고 계속 생각하고 삶으로 부딪쳐야 한다. 질문과 답하기를 반복하는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
진정 '너'를 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모든 것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어떻게 내 안의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내게 가장 큰 깨달음을 주었던 사건을 되돌아보자. 그것은 '너'의 자리를 알게 된 일이었다. 타자라는 존재를 실감했던 시건이었다. 나는 타자를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했다. 나와 공통점을 가진 사람과는 일치감을 느꼈으며 나와 다른 세계를 가진 타자와 어떻게 접촉할지 몰라서 위성처럼 겉돌았다. 그러던 내게 고통의 사건이 생겼다. 나와 일치감을 느꼈던 타자가 내 몸을 떠나간 것이다. 생살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고통으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이 고통의 이유, 이 고통의 의미를 알 때까지 심연으로 파고 들어갔다.
깊은 강물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순간 알게 되었다. '너는 나와 다른 세계를 가졌구나' 내가 일치감을 느꼈던 것은 작은 부분이었을 뿐, 알지 못하는 세계가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다른 세계 속에서 '너'가 겪었을 공포감과 외로움도 느끼게 되었다. 많은 인연과 어긋나고, 많은 인연을 속절없이 떠나보내며 알게 되었다. 나와는 다른 타자의 세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타자의 세계를 모른다는 것, 어쩌면 전부 알지 못하는 세계라는 것을 고통 속에서 알게 되었다.
진정 너를 위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익숙한 내 세계를 버리고 미지의 혹은 위험할지도 모르는 세계에 들어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겪어보았기에 번민이 많아진 것이다. 나는 지혜가 부족하다. 그래서 계속 부딪힐 수밖에 없다. 조금씩 더듬거리며 갈 수밖에 없다. '너'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너'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계속 살피며 갈 수 밖에 없다. 내가 그 고통을 피하지 않는다면, 넘어질 것을 각오한다면, 마음의 행로를 따라 한 발씩 걸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비로소 '바로 그때' 깨달음(사랑)을 알게 될 것이다. 깨달음(사랑)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힘든 것이다.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 아니라 드문 것이다.
"네가 스스로 자신의 면목을 되돌아본다면 비밀은 바로 너에게 있다."
- 스즈키 다이세츠 <가르침과 배움의 현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