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해설 수업 후기 (2)
우린 저마다의 세계에 살고 있다. 같은 영화나 같은 책을 읽고도 각자의 경험으로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같은 일을 겪었지만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각자 다른 기억을 가졌기에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른 세계를 안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전체로써의 한 사람을 마주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매우 정확하게 이해받고 싶은 사람이었다. 매우 정확하게 이해받고 싶어서 까다롭게 굴기도 하고 때로는 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기도 했다. 다시 용기를 내어 한 사람의 세계를 알기 위해 노력했다. 이해하는 동시에 동시에 이해받고 싶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야 알게 되었다. 타인의 세계는 ‘가닿기 위해 노력할 뿐’이지 가닿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가닿지 못한다는 것이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없는 것이라고, 불가능한 것이라고 너무 쉽게 정의려 버린 것 같았다. ‘가닿기 위한 노력뿐’이라는 말속에는 이미 한계를 설정하고 있었다. 가닿을 수 없다는 전제하에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말이다. 이 말은 결국 가닿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만다.
완전한 지각이란 우리가 그것 앞으로 던지는 상 기억과 융합에 의해서만 정의되고 구별된다. 주의는 그런 대가를 치른 것이며, 주의 없이는 기계적 반작용이 동반된 감각들의 수동적 병치만이 있을 뿐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한 사람의 지각은 나의 기억을 통해서 가능하다. 내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계속 찾아 나가는 것이다. 그는 이런 경험을 했던 거구나, 그가 처한 상황이 이랬던 거구나, 그 경험은 내가 아는 이것과 비슷하구나, 혹은 내가 아는 것과 밀도와 정도에서 차이가 있구나, 전혀 상황은 나와 같지 않지만, 이 정도의 세기로 온 것이구나, 이렇게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내가 쌓아온 내 세계의 기억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억을 뒤진다는 것은 나만의 기억만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만난 누군가의 기억을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이를 이해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참조할 기억은 나의 상 기억이나 순수 기억뿐 아니다. 나와 연결된 타인과 마주침을 통해 그들이 기억을 참조할 수도 있다.
이해하고 싶은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하는 말의 전부를 알 수 없었다. 알지 못하는 깊이 속에서 길을 잃는 날이 많았다. 친구가 있는 그곳이 너무 깊은 탓이었는지, 내가 들어가기를 주저했던 탓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매번 친구네 집의 문 앞을 맴맴 도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이 곳에서 단서를 찾게 되었다. 친구의 집에 들어가는 문은 내가 맴돌던 그 문이 아니었다. 내가 만나는 여러 사람들이 궁금해하던 그 친구와 닮은 경험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각자 자신의 사정과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나는 친구의 모습을 발견했고 그 친구의 집으로 들어갈 문을 찾을 수 있었다. ‘너’에 대한 이해는 고정된 ‘너’만 바라봐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너와 나의 1:1의 관계 또한 아니었다.
나는 또 다른 '너'들을 만나게 되었다. '너'의 유년시절을 만났다. '너'와 함께 했던 가족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너'의 미래도 만나게 되었다. '너'들은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 감정을 내게 이식해 주었다. 그들의 기억이 내게 전이되는 순간 나는 '너'란 한 사람을 이전보다 더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한 사람에 대한 지각은 너와 나 둘 사이의 관계는 아니다. 나의 연결망과 너의 연결망이 합쳐진 결과이다.
내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꼈던 경험 역시 이와 유사하다. 나의 사정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정확히 진단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너'가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던 순간, '너'가 나와 비슷한 기억을 찾고 있는 순간, 나의 감정에 동조되었던 순간 나는 이해받는다고 느꼈다. 그뿐만 아니다. 이해는 서로 간의 물리적 관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와 내가 만나거나 대화하는 시간 속에서만 지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몸이 떨어져 있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된다. 나의 경험이 너에게 전이되어 네가 나와 비슷한 경험 속에 놓일 때, 네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할 때, 내 생각과 감정이 너의 삶 속에서 계속 확장되어 나갈 때 나는 이해받는다고 느낀다. 우리가 함께 큰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한 사람을 지각한다는 것은 내 앞에 있는 '너'를 분별하여 보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의 관계망을 본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떠한 맥락 속에 놓여있는가. 그 맥락과 나는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를 전방위적으로 볼 때 한 사람에 대한 지각에 이를 수 있다.
나는 너를 본다. 그 바라봄은 너를 너답게 보게 하고 나를 나답게 만든다. 알 수 없었던 너가 드러나고, 알지 못했던 나를 보게 된다. 사랑은 바라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