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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ul 17. 2023

미숙함을 드러내기로 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퇴사를 며칠 앞둔 저녁, 퇴근길 방향이 같은 직원과 동행을 하게 되었다. 


팀장님, 퇴사하고 나면 모 하실 거예요?
사람구실 해야지. 아이도 돌보고, 아버지도 살펴드리고...
그리고 글을 좀 쓰고 싶어. 요즘 인터넷에 자기 글 쓰는 사람 많더라. 나도 내 이야기를 쓰고 싶어.


이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또렷하다. 늦은 저녁, 강변북로 옆으로 시커멓게 흐르던 강물, 반짝거리던 흰색 가로 등 불빛이 지금도 눈앞에 흔들린다. 그 대화를 나눈 일이 1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그날의 풍경이 잊히지 않는다. 내게 '글쓰기'는 그냥 그런 가벼운 소리는 아니었는가 보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싶다고 했을까?


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이 좋아 보였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무언가 좋아하는 취미가 있어 보이는 것도 좋았다. 좋아하는 것이 있었으면, 나도 표현하고 살았으면 싶었다. 어쩌면 글보다는 그들의 삶을 부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더 솔직히는 SNS 속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모습, 자신을 돌보는 것을 포기하지 하지 않는 중년의 삶, 이런 것들이 부러웠다. 그때 나의 글쓰기에 대한 욕망은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의 삶, 더 정확히는 그 사진과 글에서 드러난 삶을 살고 싶은 거였다. 누군가의 삶을 흉내 내고 싶은 거였다.


존 싱어 사전트 <View of Capri>, 1878, 캔버스에 유채, 25.4 x 33.7cm



지금은 왜 글이 쓰고 싶을까?


브런치 작가에 선정되었다는 메일을 읽는 순간 기쁨에 점령된 것은 순간이었다. 잠깐의 달콤한 시간이 쓸려나가고 고민거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어떤 주제를 다룰 지도 생각거리였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어디까지' 쓸 수 있을지였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때 부러워하던 그들의 삶은 이제 내 욕망이 아니다. 타인을 흉내 내는 그럴듯한 삶이 아닌 진짜 내 삶, '나'의 삶에 대해 쓰고 싶었다. 더 나아가서는 '미술치료사'로써, '상담사'로써, '미술 애호가'로써, '부모'로써, '중년'으로써가 아닌, '나'로써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내 삶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려면 나의 흑역사도 말할 수밖에 없다. 부끄러운 일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처를 드러내게 될 수도 있다.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도 있다. 나는 온전히 '나'를 드러낼 수 있을까?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받을 상처에 대해 그 몫만큼의 정당한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 끝에 일단 실명을 쓰기로 했다. 보통 작가들이 필명을 쓰는 이유는, 실명으로는 말하기 어려운 것을 쓰는 자유를 얻게 되고, 글로써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으며, 이전에 쓴 글과 거리를 두기 위함이라고 한다. 나는 그전에 쓴 글도 없고, 그전에 쓴 글이 없기에 거리두기 할 것도 없다. 오직 하나 있다면 표현하기 위한 자유일 것이다. 그런 자유는 철학수업 중 참여했던 '감정 글쓰기' 수업에서 누려보았다. 자유롭고 행복했다. 하지만 브런치에 글은 더 큰 세상에 내보이는 글이기에 조심스럽다. 아마도 쓸 수 있는 것과 쓸 수 없는 것 사이에 치열한 줄다리기가 예상된다. 그런 치열함을 마주해 보기로 했다. 그 치열함 속에 나의 한계를 알아갈 테니 말이다. 그 한계를 알게 되면 나는 더 한걸음 더 걷고 싶어 질 테니 말이다. 일단 시작해 보기로 했다. 내 이름 석자를 말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다음에는 직업이 고민이었다. 하는 일에 '미술치료사'라고 적기까지 여러 생각이 있었다. 미술치료사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내 일이 자부심일 때도 있지만 부끄러움을 느낄 때도 많다. '목사'에게 목사다움을 기대하고, '교사'에게 교사다움을 기대하듯이 심리교육업 종사자에게는 또 그에 상응하는 기대라는 것이 있다. 그들에게 있길 바라는 고정된 모습이 있다. 그것 중 하나는 '성숙함'일 것이다. 내가 만일 '미술치료사'라는 타이틀을 유지한다면 난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할 것만 같았다. 왠지 역량 이상의 성숙함을 가진 척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내가 살아내지 못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일종의 허영이다. 그 허영의 옷을 입은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허영의 옷을 입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허영의 옷을 입은 것을 알지만 벗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보았다. 또는 허영의 옷이 편하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때때로 그 옷을 입었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가진 것보다 더 예쁘게 포장했다. 안정적이고 결이 고운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했다. 그래야 세상으로부터 공격받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었으니 말이다. 지나친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이다.


나는 내 업을 말함으로써 좀 더 정확히 나를 객관해 해보려고 한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제대로 인식해보려고 한다. 과대평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과소평가하지 않는 나를 표현해보려고 한다. 이 역시 내면의 치열한 줄다리기가 예상된다. 나는 계속 변화하고 싶다. 더 나은 삶으로 가고 싶다. 변화하고 싶다면 지금의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되고 싶은 모습이 아니라 현재 되어 있는 '나'에서 시작해야 한다. 현재 모습에서 변화하는 길은 지금의 '나'를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기에 내 이름, 내 직업, 내 일, 내가 선 자리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존 싱어 사전트 <Staircase in Capri>, 1878, 캔버스에 유채,  80x44.5 cm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


미술과 마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그리고 그 내용에는 고질적인 나의 이야기를 포함할 것이다. '고질적'이라는 것은 '오래도록 앓고 있어서 고치기 어려운 일'이라는 정의를 가지고 있다. 고질적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진다. 더 심화되고 더 고착된다. '고질적' 문제가 드라마틱하게 해결되는 경우도 있다지만, 대체로는 만성질환에 가깝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제고 치명적으로 급발진할 수도 있는 만성질환이다. 


'나'를 드러내는 일은 어렵다. 고작 이름과 직업을 말하는 일에도 이런 많은 고민과 이유가 필요했으니 말이다. 나는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이는데 어려움이 있다. 여전히 타인의 비난과 평가에 취약하다. 그래서 애초에 갈등을 만들지 않았다. 피해를 받아도 괜찮은 척했고 심지어 쉽게 용서하기도 했다. 배려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이 넓어서도, 이해심이 깊어서도, 타격감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저 갈등을 회피하고 싶은 소심함이었다. 혹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리에 서고 싶은 야심이었다. 일종의 정신승리였던 것이다. 


'나'의 진면목이 드러났을 때 흔히 여러 방법을 취하곤 한다.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에서 선자는 자신의 비밀이 알려지자, 그 모든 내막을 고백하여 주변의 도움을 받았고, 선자의 첫째 아들 노아는 비밀과 함께 파괴되었다.  그리고 선자의 둘째 아들 모자수는 노아에게는 평생의 비밀이자 수치심이었던 일을 드러내며 정면돌파한다. 나는 한때 노아일 뻔했었으나 선자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모자수를 닮아보고 싶어 졌다.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는 나의 이야기,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명암을 제대로 바라보는 이야기, 현재의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이야기, 내 몫의 짐을 지고 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존 싱어 사전트<Capri Girl ona Rooftop>, 1878, 캔버스에 유채, 50.8X63.5cm, 크리스탈 브릿지 박물관 소장,



나는 어떻게 쓰려고 하는가?


심리학에 이어 철학을 배우면서 삶이 더 무겁게 느껴지곤 한다. 철학에서는 정직해라, 기만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를 보라 한다. 한걸음 한걸음이 너무 신중해진다. 가뜩이나 생각이 많아서 움직임이 둔한데 무언가 하는 것이 더 조심스러워졌다. 너를 위한다는 충고가 실은 네가 아닌 나를 위한 말은 아니었을까? 내가 하는 행동은 선의일까 아니면 위선일까? 이것은 성숙일까 성숙-코스프레였을까? 솔직했던 것일까 아니면 강요를 포장한 것일까? 한발 한 발이 조심스럽기만 하다. 


조심스러움이 무거워진 이유는 지혜로운 자들의 사자후에 경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심히 행동하라는 말은 완벽해질 때까지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숨으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책임질 행동을 하라는 말에 가깝다. 미숙함을 드러냈을 때 미숙함을 책임지고, 상처 주었을 때 상처 준 만큼 책임지고, 상처받았을 때는 그 책임을 따지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언젠가는 언제고 오지 않는다. 정신(의식)은 오직 물질(몸)을 통해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조심조심 걷는 이유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해서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앞에 바짝 서는 일이다. 나의 한계가 여기임을 아는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한걸음을 걷는 일이다. 


나는 글을 통해 미숙함을 계속 드러내려고 한다. 때론 거칠고 유치할지라도, 나도 모르게 다시 허영의 가면을 쓰게 될 지라도, 모든 부끄러움을 안고 이대로의 미숙함을 드러내려고 한다. 지금 쓰는 이 글에 대해서도 '과연 정직했는가?'를 반문하게 된다. 아직 선언문에 불과한 글을 보며 비루함도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나를 드러내지 않고 이대로의 나조차 만나지 않는다면 내 삶은 엉터리로 끝나버릴지 모른다. 미숙함을 드러내야 성숙해질 수 있다. 나를 자라게 할 햇빛은 수많은 타자들 속에, 타자들의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미숙함을 드러냄으로써 현재의 나를 확인하고, 혹시라도 모를 미래의 삶으로 조금씩 들어가 보자. 오늘 나의 발걸음이 미래의 나에게 어떤 의미로든 당도할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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