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일리치는 성실히 일하며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고약한 병환에 시달렸으나 아무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않는 상황이 되고나서야 삶의 진실을 알게된 것이다. 자신이 이토록 고통받는 이유가 인생을 '잘 못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렵게 인정하게 된다. 이반일리치는 그제라도 '옳은 일'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옳은 일'이 무엇인지 선듯 답을 찾지 못한다.
이반일리치는 죽기 전 마지막 며칠을 극한 고통에 시달리고, 가족들은 그 고통의 신음 소리를 견딜 수 없어한다. 이반일리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옳은 일’을 한다. 그것은 고통을 말하지 않는것이다. 살을 파고드는 극심한 고통을 최대한 참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족들 앞에서 의연함을 보이려고 애쓴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괴로워할 가족을 위해 고통을 감추려고 한다. ‘나’의 고통이 아닌 ‘너’의 고통을 보게 된 것이다. ‘너’의 고통을 보게 된 후에야 비로소 ‘나’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반일리치의 '옳은 일'이란 바로 '너의 고통을 알아주는 일’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타인의 고통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생객해 보게 되었다. 부모님께 난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정말 ‘너’의 고통 속에 있었을까? ‘너’의 고통이 괴로운 ‘나’만 보고 있지 않았을까? ‘너’의 고통을 돌보느라 힘든 ‘나’의 고통에 매몰된 것은 아니었을까? 병든 부모에게도 이럴진대 타인에게는 또 어떻게 했을까? 너를 걱정한다는 말로 ‘너’를 위해주고 싶은 나의 공명심이 앞서지는 않았을까? ‘너’의 허물을 이해해 주는 말을 하면서 ‘나’가 우월해지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너'의 일이 나의 일이 아니어서 안도감이 스치지는 않았을까?
죽음의 이야기 앞에서는 정직해진다. 정직해져야 한다.
2022년 봄, 덕수궁 돌담길에 놓여진 이름모를 예술가의 설치작품
이해하고 싶은 타인의 고통이 있다. 가까웠던 친구와의 일이다. 어느날, 그 친구는 나와 좀 먼 거리에 있고 싶다고 했다. 나와 기쁨을 나누지 못해 힘들다고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나에 대해 무거움을 느끼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힘든 일이 있어도 잘 표현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타인에게 도움을 바라는 일이 흔치 않다. 오히려 나의 문제는 이런 지나친 독립성에 있었다. 혼자 문제를 짊어지고 가려고 했기에 오히려 감정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을 만들곤 했었다. 그랬기에 누군가의 걱정을 지나치게 느껴본 적이 없다. 지나치게 걱정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몫은 내가 책임져 나갈 텐데 왜 나의 짐을 지며 무거워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이의 걱정이 과도해 보였다. 하지만 그 걱정의 실체가 무엇이건 간에 그는 나의 문제에 질식되어 갔다. 고통에 신음했다.
그런 고통의 음성을 희미하게라도 듣게 된 것은 '죽음'때문이었다. 불현듯 '만약 우리가 죽음앞에 있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죽음 앞에 있다면 오해, 미움, 원망 같은 것들이 무슨 대단한 일들일까? 나의 서운함이 죽음앞에서까지 결백을 주장 할 만한 그런 일이었을까? 오해 또한 집착의 결과이지 않을까? 내가 옳고 너가 틀렸다는 집착 말이다.
나의 고통을 밀어내고 그이를 이해해 보고 싶었다.함께 기뻐할 수 없었던 그이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그이가 느꼈을 그 무거움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행복을 말하면서 내 눈치를 살펴야 했을 때 얼마나 서러웠을까? 그런 자신이 이기적라며 얼마나 자책에 시달렸을까? 하고 싶은 말이 나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얼마나 조심했을까? 빙빙 돌리는 말을 하면서도 그 속에 숨은 뜻을 알아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을까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 참 어려운 일이다. 나의 고통이 뼛속까지 짓이겨 들어왔을 때나 겨우, 겨우 한 조각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인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것이라고 했다. 인간 안에는 선과 악이 함께 있다. 그런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밝음 이면의 어둠을, 선량함 이면의 추악함을, 단단함 이면의 연약함을, 친절함 이면의 폭력성까지 껴안는 일이다. 이 모순됨까지 사랑하는 일이다.
나는 인간의 밝음을 더 많이 보려고 했다. 어둠이 보이면 불안하고 불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밝음으로 가려고 노력했다. 세상을 밝게 더 밝게 바라보면 어둠을 물리칠 수 있을 생각했다. 어리석었다. 어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 자체가 어둠이라는 것을 생각치 못했다.나는 지금에서야 나에게도 있고 너에게도 있을 어둠을 본다. 추함, 연약함, 폭력성을 본다.그 어둠의 끝에서야 비로소 '너'의 연약한 순결함을 겨우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이반일리치가 깨달은바 처럼, '너'를 가볍게 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가벼워지는 길은 '너'가 가벼워질때 가능한 일일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