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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Aug 10. 2023

최후의 기억

기억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남겨지는 기억

제임스 휘슬러 <회색과 검은색의 구성 : 휘슬러의 어머니>, 1871


미술치료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첫 실습지로 노인요양원을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80에서 90세 정도의 중증치매를 앓고 계신 어르신들을 만나게 되었다. 병실에는 할머니들이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고 들어오셨다. 자의로 오신 것인지, 보호사의 손에 이끌려 할 수 없이 오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할머니들은 무표정하고 굳은 얼굴을 하고 계셨고 언어적인 의사소통까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분들의 굳은 표정을 보며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마치 제임스 휘슬러의 그림처럼 함께 있는 그 방은 그저 무채색으로 가득 차보였다. 


하지만 몇 번이 만남이 계속되는 동안 어르신들의 과거의 삶을 조금씩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색연필을 손에 꽉 쥘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메마르고 쭈글쭈글해진 손이지만, 그 손으로 자식들에게 음식 해 먹인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 시절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 떠올려 보려고 애쓰셨다. 




내가 방문했던 시절은 꽃이 한창 만개하던 5월이었다. 요양시설 생활을 하다 보면 계절감각이 둔해진다고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꽃을 보며 더 웃으시라고 장식할 수 있는 꽃들을 다양하게 준비했다. 꽃잎을 하나씩 보며 고향에 피던 꽃 이름을 같이 찾아내곤 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같이 노래를 불렀다. 나와 함께한 치료사 일행과 할머니들은 '달아 달아' 떼창을 부르기도 하고 어깨를 들썩거리기도 했다. 미술치료를 하러 갔다가 음악치료, 운동치료, 아니 레크리에이션치료라고 해야 하나. 수련생이었던 나는 뭘 하는지도 모른 채 그분들이 조금이라도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돕기 위해 바둥거렸다.


밀레, <수프 떠먹이는 어머니 >, 1860


이런 우리 일행에게 한 어르신은 연신 '수고하셨어요', '고마워요'라며 인사를 하셨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면서 우리의 등을 쓸어 주시면서 걱정하셨다. 미술 작업을 할 때는 소근육 사용이 어려우셔서 작업을 도와드릴 일이 많았다. 대신 색을 칠하고 대신 조립을 해주며 마치 리모컨 버튼을 누르듯 말씀하시면 나는 작품 제작을 도와드려야 했다. 그분께 어떤 색을 원하는지, 어떤 장식을 원하는지 여쭈어보면, 항상 '다 좋아요', '알아서 하세요' 라며 자신의 의사를 말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타인의 욕구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선호는 생각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마치 밀레의  <수프를 떠 먹이는 어머니 > 속의 여인처럼 자신보다는 자식과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양보하는 삶을 사셨던 것은 아닐까? 조금 더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셔도 좋으련만. 그저 그분의 뜻에 따라 드릴 뿐이었다. '어르신이 좋다고 하시니 저도 기뻐요'라고 말해드릴 뿐이었다. 타인의 만족이 곧 자신의 만족이셨을 테니 말이다.



<아메리칸 고딕, 그랜트우드 , 1930>


또 다른 어르신은 떨리는 자신의 손을 부끄러워하셨다. 작업한 결과도 잘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고 자신감이 없으셨다. <아메리칸 고딕 >의 여인처럼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며 사신건 아닐까 싶었다. 처음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좀 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즐겁게 어울렸으면 바랬다. 그러나 그분의 방식에 따를 수밖에 없다.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다. 마치 우리만의 비밀이야기를 나누듯이 작품에 대해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줘도 되는지 조용히 허락을 구해볼 뿐이다.



베르트 모리조 <바느질하는 여인> 1881

신중한 작업 태도를 보이시고 실수를 하면 지우려고 애쓰시는 어르신이 계셨다. 그리기보다 지우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이 들어갔다. 어르신께서는 젊은 시절에 손재주가 많아서 이것저것 다 잘했다며 자랑하기도 하셨다. 아마도 바느질 수 하나 빠트리지 않는 일처리 깔끔하고 확실한 분이 아니셨을까? 자신과 주변의 관리를 잘하셨던 엄격한 분은 아니셨을까?



유진 드 브라스 <세레나데>, 1910


또 다른 어르신은 마음에 드는 것은 '예쁘다', '좋다'라고 하며 호방하게 이야기하셨다. 또 노래에 장단도 잘 맞춰주시며 흥이 많으셨다. 장난치기도 좋아하셔서 점토로 만든 밥상을 가지고 소꿉놀이 시늉도 하셨다. 아마도 젊은 시절에는 <세레나데 >의 여인들의 옷 색깔처럼 자신의 색깔이 분명하고 감정표현에 솔직하셨을 것 같다. 


지금은 정확한 고향의 지명도 자녀의 수도 너무 오래되었다며 기억해 내지 못하셨지만 어르신들마다 놓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기억이 없어져도 남아있는 그분들만의 무늬가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도 일상의 기억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잊지 못하는 것이 있으셨다. 두 분 모두 돌아가시기 직전에 섬망이 찾아왔다. 섬망은 신체기능이 쇠약해지면서 뇌기능이 함께 약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 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하고, 심하며 환시, 환청을 경험하기도 한다. 치매 증상과도 유사하다. 


어머니는 임종 직전에 아버지가 외도를 한 것 같다며 의심하셨다. 아버지가 과거에 외도한 사실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우리 가족뿐 아니라 형제분들도 알뜰히 챙기셨던 분이셨는데, 어머니는 이 점을 감당하기 어려워하셨다. 처자식은 버려도 형제는 못 버린다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크게 상처를 받으셨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신뢰하기 어려우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평소 자신은 물론 타인게도 엄격하셨다. 특히 예의범절을 강조하셨다. 우리 집에서 전화통화는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만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너무 이른 시간 또는 너무 늦은 시간에 오는 전화는 대부분 안 좋은 소식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다. 급한 일이 아니면 절대 낮 시간 외에는 하지 말라고 하셨다. 쓸데없는 걱정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게 평소 생각이셨다. 아버지는 항암치료 중에 여러 번 섬망을 경험하셨다. 그리고 늦은 밤, 낮, 새벽을 가리지 않고 전화를 걸어오셨다. 아버지도 누군가 필요하고, 가족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하셨을 것이다. 그것을 누르고 있던 조절장치가 결국은 느슨해지셨다.


수년전 요양원에서 만난 할머니들, 그리고 내 부모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생각하곤 한다. 과연 인생의 끝자락에 놓인 나는 어떤 모습일까? 기억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몸에 남겨질 최후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오늘 내가 살아간 모습일 것이다. 오늘 나의 감정, 오늘 나의 생각, 오늘 나의 행동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나는 남는다. 과거의 내가 오늘의 기억에 남겨져 있듯이, 오늘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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