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아이바조프스키 <Among the Waves>
러시아의 낭만주의 화가 이반 아이바조프(1817~1900)는 해상풍경화로는 독보적인 작가이다.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뿐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에서, 바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그린 그림들이 많다. 그래서 그의 바다의 더욱 생생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작품 <파도 속에서>는 바다에는 수많은 물줄기들이 모여든다. 사방의 강에서 흘러들어온 물들, 수질도 다른 물들이 바다로 들어와서는 하나가 된다. 때론 같은 결의 파동을 만들며 넘실거리지만, 때론 거칠게 요동치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에도 파도와 같은 파동이 있다. 나와 같은 파동은 편안함을 주고, 나와 다른 파동은 나의 파동과 중첩되어 다른 리듬을 만들어 낸다. 호기심이 많은 이가 곁에 있으면 같이 마음이 들뜨고 설렌다. 긴장이 심하고 강박적인 사람을 만나면 근육이 경직되고 눈앞에 투명한 막이 세워진 것만 같다. 우울한 사람과 있으면 끈적한 갯벌에 같이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며, 분노한 사람을 만나면 같이 뜨거워지기도 혹은 도망가고 싶어 진다. 사랑 또한 파동으로 전달된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게 들어오면 내 마음도 훈훈해지고 따뜻하게 출렁거린다. 미움도 마찬가지다. 그 미움이 내게 들어오면 마음이 얼어붙고 차가워서 당황이 된다.
공감한다는 것은 상대의 파동과 같이 공명하는 일이다. 같은 호흡으로 파동을 느끼는 일이다. 그러나 같이 공명하는 것에는 위험성이 있다. 상대의 파동이 너무 거셀 때는 회오리바람처럼 같이 휩쓸리거나, 너울성 파도에 휩쓸려 나가기도 한다. 때론 내게 오는 파동이 너무 거세서, 혹은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나의 마음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 이는 상대의 파동에 의해 내가 잠식되는 경우이다. 상대의 감정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말을 못 하는 갓난아이가 빽빽거리며 운다. 울음의 의도를 모르는 어른은 아이를 달랠 수가 없다. 아이 스스로도 자신이 배가 고파 힘든 것인지, 기저귀가 젖어 찝찝한 것인지, 졸려워서 짜증이 난 것인지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저 불쾌하고 불편하고 죽을 것 같은 통증과 두려움이 생길 뿐이다.
갓난아기는 자신의 이러한 두려움을 울음으로써 부모에게 신호를 보내지만 아이의 신호에 무신경한 부모는
‘재가 왜 저러지?’하며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반대로 아이의 신호를 공포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부모는 아이와 같이 두려움에 잠식된다. ‘대체 왜 그렇게 우는 거야? 하며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흘리며 무기력을 느낀다. 아이의 불안에 압도되는 것이다.
반면 아이의 불안한 감정을 감당할 수 있는 부모는 침착하다. 아이의 울음을 읽으려 한다. 아이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한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그 이유를 알아낸다. 그리고 ‘괜찮아, 엄마가 재워줄게’라고 하며 침착하게 말한다. 아이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아이의 감정을 보듬어 준다. 그리고 아이의 고통스러운 울음에 반응한다.
공감은 서로의 파동을 일치시키는 일 그 자체가 아니다. ‘나’와 ‘너’는 서로 다른 파동을 지니고 있다. 같은 파동이라도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따라 다르게 일렁거린다. 공감이라는 것은 ‘같음’에 있지 않고 ‘다름’을 견디는 노력일 것이다. 그 다름의 메시지를 읽어내려는 노력일 것이다.
공감은 큰 바다가 물을 담고 있듯이 ‘너’의 감정을 가만히 담아줄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파도의 물결을 느끼면서, 파도의 위력을 견디고 버티며 그 부딪힘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일이다. 소리치는 파도의 거친 음성을, 그 외침을 알아채주는 일이다. 두 개의 파동이 만나고 난 후, 서로 달랐던 파동들은 다시 하나가 된다. 중첩되었던 리듬은 하나로 수렴되며 요동이 가라앉는다. 그렇게 공감은 이루어지고 바다는 다시 고요해진다. 공감은 파도가 치듯 자연스러운 과정인 듯 보이지만 어쩌면 매우 의지적인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너와 나의 '같음'을 보는 것이 아닌 ‘다름’을 극복하려는 노력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