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르느와르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흐물흐물한 형체, 밝고 따뜻한 느낌, 모두 웃고 있는 등장인물,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은 조화로움 등이 거북했다. 비 현실적으로 보였다. 이 세상에는 어둡고, 고약하고, 구린내로 가득한데 어떻게 저런 그림을 그렸을까? 현실을 회피하는 것만 같았다. 특히나 그에게 따라붙는 '행복을 그리는 화가'라는 수식어는 더욱 식상하고 거부감이 들었다.
르느와르의 그림처럼 따뜻하고 밝은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위선적으로까지 보이기도 했다. 이는 나의 반감이 투사된 것이다. 내가 세상을 암울하게 보고 있으니 밝은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현실도피이거나 위선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음습함은 그대로 둔 채 겉모습을 꾸미고 분칠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이 사탕발림 같은 겉치레에 불과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디에선가 르느와르가 그림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란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 삶과 다른 그림이라. 그것이 가능할까? 르느와르의 삶이 궁금해졌다. 르느와르와 관련된 자료를 찾던 중 그의 대표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르느와르, 아름다움을 그리는 사람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년, 캔버스에 오일, 175X131cm, 오르세 미술관
'물랭 드 라 갈레트'는 프랑스 파리 북부의 몽마르뜨 언덕에 위치한 카페 이름이다. 평일에는 갈레트 빵을 판매하는 제분소였지만 주말에는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는 무도회장으로 이용되곤 했다. 르느와르는 이곳의 장면을 그리기 위해 작업실을 몽마르뜨로 옮길 정도로 그에게 특별한 장소였다.
르느와르의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밝다. 왼쪽 편에서는 춤을 추고 있으며 오른편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 그림 속에는 르느와르의 지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앞쪽 줄무늬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모델인 잔느, 그녀에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여인은 잔느의 언니인 에스텔이다. 그들 주변에 있는 남자 세명은 르느와르의 지인이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몸을 밀착하여 춤을 추거나 눈빛을 교환하고 소통을 하는 등 정서적 교류를 나누고 있다. 누구 하나 소외되어 있지 았았으며 그들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르느와르의 그림에는 경계선 없이 흐릿하게 표현되어 있어 인물들 간의 교류가 더욱 활발하게 느껴진다.
빈센트 반고흐 <물랭 드 라 갈라트>, 1886년 독일 크뢸러 밀러 미술관
'물랭 드 라 갈레트는'는 많은 예술가들이 그린 장소이기도 하다. 고흐, 로즈텍, 피카소, 등도 이 장소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빈센트 반고흐는 물랭 드 라 갈라트의 건물 외관을 그렸다. 간혹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 빈 공간이나 무도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오는 장면을 건물 밖에서 그린 그림들이 있다. 이 작품이 그려진 1880년대는 '물랭 드 라 갈라트'에서 밀을 제분하는 기능은 종료하고 무도장으로만 이용되기 시작하던 기간이었다. 무도회장 안이 아닌 외관을 그렸다는 것에서 고흐의 성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좌) 로트렉 <물랭 드 라 갈라트의 무도회>,1889, 캔버스에 오일, 88.9 x 101.3 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우) 파블로 피카소의 <물랭 드 라 갈레트>, 1900년, 캔버스에 오일, 89.7 x 116.8 cm, 구겐하임 뮤지엄
로트렉과 피카소도 '물랭 드 라 갈라트'를 그렸다. 왼쪽에 있는 로트렉이 그린 무도장은 외로움과 소외가 강하게 느껴진다. 그림은 상하로 구분되어 위쪽은 춤을 추는 사람, 아래쪽은 춤을 추는 사람을 지켜보는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그려졌다. 춤을 추는 사람들보다 옆모습만 그려진 두 명의 여인과 한 명의 남자가 이 작품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신나게 춤을 추며 즐거워하는 외로움은 더 큰 고립으로 느껴진다.
반면 피카소가 그린 무도회장은 욕망이 이글거리는 장소로 묘사되었다. 이 그림에서는 좀 더 공격적이고, 좀 더 과시적이고, 좀 더 충동적으로 느껴진다. 홀로 있는 사람들도 로트렉이 그린 인물들처럼 위축된 것이 아니라 마치 목표물을 포획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사냥꾼 같은 표정이다.
하나의 장소를 보는 작가의 시선은 모두 다르다. 르느와르는 어떻게 이렇게 따스하고 부드러운 시선을 가지게 된 것일까? 더욱이 르느와르가 그림을 시작하던 청년기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끝난 이후로, 독일군에 의해 포위된 파리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굶어 죽을 정도로 사정이 어려웠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르느와르의 작품에는 슬퍼하거나 우울해하는 인물들은 없다. 더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삶의 순간만을 포착했다. 이것은 현실을 회피한 것 일가? 아니면 타고난 낙천성일까?
르느와르 <테라스에서>1881, 캔버스에 유채, 100.4X80.9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그림은 행복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 아름다움."
피에르 오귀스트 르느와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는 가난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석공이었으며 어머니는 재단사였는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르느와르는 13세부터 도자기 공장에 들어가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프랑스에 산업혁명의 바람이 불면서 도자기 공장은 기계화되었다. 르느와르는 실직을 한 후에 부채에 그림을 그리는 곳으로 직장을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붓을 다루는 법을 익히게 된다.
학교를 갈 정도로 돈을 모은 르느와르는 예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입학하였고 21세가 되어서 중견화가 글레이르의 작업실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게 되었으며 이때 이곳에서 만난 모네, 시슬레, 카유보트 등과 우정을 쌓아가며 인상주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르느와르를 비롯한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평론가들의 악평에 시달렸으며 그림은 헐값에야 겨우 팔리는 정도에 그쳤다. 그는 늘 물감 살 걱정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1892년에 열린 뒤랑 뤼엘 화랑에서의 전시에 작품을 전시하게 되고 프랑스 정부는 르느와르의 그림을 구입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재정적 궁핍함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30년 만에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젊은 시절에도,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노년기에도 그는 우울, 불안, 걱정과 같은 감정을 그림으로 그리지 않았다. 르누아르는 시종일관 아름다운 그림을, 행복과 즐거움을 표현한 그림을 그렸다.
"나는 걸작에 단 한 가지를 요구한다. 바로 '즐거움'이다."
그림을 그릴 당시에 그의 스승이었던 샤를 글레라는 당시 잘 사용하지 않는 원색을 주로 쓰는 르느와르를 냉소하며 "너는 너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르느와르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잖아요"라고 대답했다고 회고한다. 르느와르는 예술이 가지고 있는 엄숙한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생동감 있고 감각적인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르느와르는 물감살 돈이 없어 걱정하고 먹을 빵이 없어 배를 주릴 때에도 친구와 음식을 나누며 "우리는 매일 먹지 못하지만, 나는 여전히 매우 즐겁네"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르느와르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행복이며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르느와르에게 그림은 아름다움의 발견이었으며 아름다움이 표현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그림은 행복하고 즐겁고 아름답다.
(좌) 류마티스 투병중에 굳은 손가락에 붓을 묶을 채 그림을 그리는 모습/ (우) 69세에 그린 자화상
"나는 아이처럼 그리기 시작한다. 어떤 방법도, 기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르느와르는 성실한 화가였다. 유년시절 도자기 화공으로 일할 때도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루브르박물관에 방문하여 고대 조각을 스케치하고 로코코 거장들의 작품을 반복하여 모사하였다. 르느와르는 60년 가까이 활동하게 되면서 약 6000점의 작품을 남겼다. 르느와르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렸다. 르느와르는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고 있었는데 노년에 점점 악화되어 극심을 고통을 겪게 되었다. 1904년에는 몸무게가 47kg밖에 나가지 않았고 앉아 있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더 이상 손에 붓을 쥘 수 없게 되자 굳은 손가락 사이에 붓을 묶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며 "그림을 그리는 데 꼭 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병색이 짙었던 르느와르의 말기작에도 절망이나 비탄은 찾아보기 어렵다. 르느와르가 생의 마지막에 그린 작품들은 모두 행복과 기쁨을 표현하는 작품들이었다.
"인생의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는다."
르느와르 <검은 옷의 두 소녀>, 1881-82년, 캔버스에 오일, 81.3X65.2cm,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
검은 옷을 입은 두 소녀가 있다. 옷 밖으로 드러난 얼굴과 밝게 빛나는 피부가 아니라면 이 그림은 매우 어둡고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어두운 검은색과 비교가 되는 것은 그녀의 광채 나는 피부이다. 어두운 옷은 소녀들이의 살갗을 더 생동감 있게 만든다.
르느와르는 어떤 조건 속에도 기쁨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악착같이 기쁨을 쫒았던 예술가이다. 그 악착같음은, 그 지루한 노동은, 매일 그릴 수밖에 없는 그림은 자연스레 삶의 기쁨, 생명의 활기를 포착해 냈을 테다. 그는 그리는 한 행복했고, 그림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과 만났을 것이다.
내가 르느와르의 그림이 아름다움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의 그림을 멀리서 관조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고통스러운 장면을 관조하면 고통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듯이 아름다움도 거리를 두고 보면 그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경험할 수 없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좀 더 경험해 보기 위해 나는 내 삶의 어두운 장면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나의 삶에서도 슬픔이지만 기쁨이 포착되었던 순간이 있다.
찰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
내게도 슬픔 속에서 기쁨이 함께 있던 순간이 있다. 엄마가 죽었을 때의 일이다. 엄마는 소뇌위축증이라는 희귀 질병으로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엄마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다. 엄마는 누구와도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이별을 맞이해야 했다.
난생처음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장례식은 상주들에게도 낯설고 문상객들도 낯선 장면이다. 죽음도 이별도 너무 어렵고 서툴기만 하다. 친구가 찾아왔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여서 서로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엄마를 사진 속에서 보게 된 친구의 눈빛이 흔들렸다. 친구는 엄마에게 먼저 인사를 마쳤다. 우린 친구지만 그래도 맞절을 했다. 한번 절을 마쳤다. 친구는 한번 더 절을 하려고 고개를 숙인다. "한 번만 해. 난 아직 안 죽었어." 친구의 눈에서는 눈물이, 입에서는 웃음이 같이 흘렀다.
발인이 있는 전날밤 뒷정리를 하기 위해 조의금 함을 열었다. 봉투에 든 돈을 꺼내는데 올케 언니가 "엥~"하며 놀라는 소리를 낸다. 봉투 속에는 오천 원권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오만 원권과 헷갈린 것이다. 당시에 오만 원 신권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시기여서 오천 원과 오만 원을 헷갈려하는 일들이 많았다. 진지한 조의금 봉투를 열며 상주들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장례식장이었지만 심각할 필요는 없었다.
마지막 절차만 남았다. 화장을 끝나고 유골 안치를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회사 직원 한 명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프로젝트 막바지라 장례식장에는 못 왔다며 장지까지 찾아온 것이다. 고맙고 또 고마워서 눈물이 핑글 돌았다. 그는 눈물이 그렁거리는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말한다. "날씨 한번 좋다." 나도 그를 따라 하늘을 보았다. 날씨가 맑았다. 우리 엄마는 좋은 날 가셨다. 맑은 날 저 세상으로 가셨구나.
엄마는 꽃을 좋아하셨다. 봄이 끝나기 전에 병원 밖으로 나가 꽃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엄마는 꽃을 보지 못한채 돌아가셨지만, 내게 가장 아름다운 꽃을 선물해 주셨다. 슬픔 속에서 발견한 꽃이었다. 죽음에조차 웃음이 있었다. 행복은 따뜻하고 평화롭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슬픔이 없는 행복은 생명이 없는 꽃이다. 삶의 불행을 수용할 때 비로소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행복은 슬픔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역량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비치는 찰나를 포착할 수 있는 힘이다. 그날 나는 눈물 너머에서 흩날리는 꽃을 보았다. 그날 내가 본 것이 환영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르느와르의 작품 속 아름다움은 찰나의 아름다움이다. 그의 작품은 슬픔속에서 포착된 기쁨의 찬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