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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Sep 18. 2024

예술, 너의 고통과 함께함

케테 콜비츠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슬픔과 무력감


지난여름 제주도에 있는 4.3 평화기념관에 방문했다. 그곳에서 제주라는 섬이 품은 슬픔을 보게 되었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휴양지이다. 일상의 피로를 풀고, 자연을 보며 마음을 위로하며 각종 레저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렇다. 제주도는 즐기는 곳이다. 그런 제주도에 이런 깊은 슬픔을 품고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단독 선거와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별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결론으로 제주 4.3 평화공원 안내 책자에서 인용함)


현재까지 희생자로 신고된 사람은 1만 4천 명(최대 3만 명 추정)이었으며 이는 당시 제주도민의 10%에 상당하는 숫자이다. 남자, 여자, 어른, 아이 구분할 것 없이 살해, 폭행, 방화, 강간 등 처참한 일들이 일어났다. 전시물을 하나하나 보는 동안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웠다. 이런 일이 역사 속에 있었는데도 까맣게 모르고 살았구나. 어떻게 이런 역사가 알려지지 않았을까? 놀라고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전시물을 읽어 나갔다. 끔찍한 사진도 있었지만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았다. 특히 그곳에 설치된 조형작품과 영상자료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몸으로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괴로움을 관조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내가 본 고통을 하나씩 몸에 저장을 했다.


4.3 평화기념관을 끝으로 제주의 여정을 모두 마친 후 제주공항으로 향했다. 제주공항은 4.3 사건 피해자들이 유해가 발굴된 장소이기도 했다. 제주공항 공사를 하던 중에 유해가 발견되었고 이후 몇 차례의 발굴작업을 통해 수백여구의 유해를 추가로 수습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대와 설렘으로 도착하고 추억을 간직하고 떠나는 제주 공항이 이런 아픔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아이러니를 느끼며 제주 공항으로 갔다. 마음이 어지럽고 복잡했다.


공항에 도착한 후 식당으로 갔다. 메뉴를 신중하게 골랐다. 그날 처음으로 씹는 밥알이 쫀득하니 달큼했다. 얼큰한 해물 된장찌개가 시원했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 안에서 보리라 생각했던 4.3 기념관 책자는 열어보지도 못한 채 밀려온 여행에 피로에 무참히 쓰러졌다. 김포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머릿속이 다시 어수선해졌다. 하나는 4.3 사건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그 끔찍함을 반나절도 기억하지 못하는 하찮음 때문이었다. 배고픔과 피로는 고통을 쉽게 지워버렸다.


인간은 자신을 보존하려고 한다. 너무 힘든 것에는 깊게 빠져들지 못한다. 힘들고 괴롭기 때문이다.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다짐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본 고통이 남일 같이 느껴지는 내가 싫었다. 내가 남의 고통을 대하는 방식이 결국 나에게도 되먹임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의 고통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처럼 나의 고통에 대해서도 그들은 남의일로 바라볼 것이 아닌가. 세상은 다 그런 것이라고 무기력해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이런 하찮음을 넘어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좀 더 나은 삶으로 걸어갈 수 있을까?



'함께' 느끼고 '함께' 슬퍼해야만 '함께' 이긴다


독일의 화가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의 작품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개입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케테 콜비츠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평생을 가난하고 상처받고 피해받은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 케테 콜피츠의 그림의 주제는 사람이었다. 가난한 노동자, 전쟁에서 굶주린 아이들, 전쟁의 피해자 등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연민을 가지고 연대했다.

 

케테 콜비츠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1903


케테 콜비츠의 작품에는 상징적 표현도 기교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그린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보면 알 수 있는, 감각적으로 신호가 오는 그런 그림이다. 한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다. 아이의 영혼은 이미 떠났으며 앙상하게 마른 육체만 어미에게 남겨져 있다. 어미는 그런 아이를 보내줄 수가 없다. 다시 자신의 몸에 넣기라도 할 것처럼,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리려는 것처럼 아이를 온몸으로 품고 있다. 그림을 보며 나도 그림 속 고통에 빠져든다. 그림을 오래 쳐다보고 있기도, 고개를 돌려 버리기도 괴로울 지경에 이른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에는 고통에 함께 머물게 하는 힘이 있다.


그림을 본다는 행위는 대상화되기 쉽다. '본다'는 행위에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아 버리거나 고개를 돌려 버리면 그만이다. 고통을 겪는 '너'와 고통을 보는 '나'사이에 어쩔 수 없는 거리가 있다. 그림 속의 '너'는 슬픔을 온몸으로 겪고 있지만 바라보는 '나'는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그림 속의 '너'와 바라보는 '나' 사이의 간격을 좁힌다. 때론 깊게 엉키고 서로를 달라붙게 만든다.


케테 콜비츠, <어머니들> 1919 / 케태 콜비츠, <전쟁’ 중 ‘어머니들>, 1921~1922


케테 콜비츠의 초기 작품의 소재는 가난하고 불쌍한 노동자 들이었다. 그러다가 1914년에 1차 대전에 참가한 둘째 아들이 전사하게 된 후 전쟁 반대를 호소하는 포스터를 만들고 전쟁 연작 시리즈를 작업한다. 케테는 작품을 통해 전쟁으로 인해 죽은 아이들에게 비극을 막아내지 못한 어른으로써 사죄하였으며, 동시에 아이를 잃은 부모의 고통과 함께 하였다.


케테 콜비츠 작품 속 인물들은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처참하게 쓰러지지 않는다. 그들은 좌절하면서도 무너지지 않으며 분노나 복수심의 감정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그들은 끔찍한 현장에 있으면서도 고통 속에 사그라들지도 화염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함께 한다.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나 역시 괴로워진다. 고개 돌릴 수 없, 회피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마음에는 한줄기 흔적이 새겨진다. 내가 느낀 것에 대한, 내가 느낀 것만큼의 고통이 내게도 새겨진다.


고통받고 있는 인물들이 고통 속에 사무치지 않으며,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을 방관자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케테 콜비츠가 작품을 통해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는 상처받은 이들의 상처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작가는 그런 고통을 느낀 채 작업을 하기에 그녀가 그린 선에, 종이에 그 고통이 서려있다. 케테 콜비츠는 '함께하는' 마음을 느껴야만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케테에게 작업을 하기 위한 동기이자 의지였다.

"이번 작품전은 작품 한 점 한 점이 모두 나의 삶의 한 부분으로서 내 생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어"

(1917년 전시를 앞두고 쓴 편지에서)



너와 함께 아파할 것이다.


케테 콜비츠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1942


예술을 통해 반전 평화운동을 펼치던 케테 콜비츠는 나치로부터 퇴폐미술로 낙인찍히며 전시회를 금지당하게 되는 등 고초를 겪게 된다. 그리고 1942년 2차 대전에 참가한 손자가 죽는다. 그 후 케테 콜비츠는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석판화를 만든다. 그것은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이다. 이 작품에서의 어머니는 세 아이를 품고 있다. 작품 속 어머니는 다른 그림보다도 강인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이전과 같은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다. 그녀의 팔뚝은 더욱 굵어졌고 손은 더 커졌다. 고통을 먹을수록 더욱 강인해진 어머니는 어린아이들을 자신의 몸 안에 품는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밖에 없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인간을 위한 다짐이자 명령이었다.


케테 콜비츠는 타인의 고통을 깊게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고통을 회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을 함께 직면하고 그들과 함께 아파했다. 고통을 함께 하는 예술은 "슬픔을 구출"할 수도 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게 하고, 더는 슬픔에 무감각하게 만들지 않으며, 함께 슬퍼하게 만들기에, 슬픔에 빠진 너를 구출하기 위해 기어이 슬픔 속에 뛰어들게 만드는 힘. 그것이 예술이 가진 힘이다.


예술가는 고통을 함께 느끼며 아름다움을 표현하며, 정치인은 고통을 함께 느끼며 제도를 바꾸고, 언론인은 고통을 함께 느끼며 진실을 알린다. 이것은 특정한 사람의 일로 미룰 문제가 아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경험한 고통을 잊지 않는 것, 고통에 무감각 해지지 않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무기력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씨앗'을 지키는 일이다. 나는 함께 아파할 것이다. 무언가 하지 않고는 그 통증을 배겨낼 수 없을 때까지 아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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