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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un 30. 2023

피카소가 어린 아이처럼 그리고 싶었던 이유

피카소의 후기 작업들

  작년 봄부터 여름 동안 감정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자신의 어둠과 밝음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써 내려가는 수업이었다. 심리치료와 관련한 프로그램들을 여럿 경험해 보았지만 이 수업은 정말 말 그대로 하드코어였다. 난 이 프로그램에서 최대한 내 허물을 벗고 다른 삶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상자 속에 가둬두었던 어둡고 음습한 기억들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내가 상처받은, 내가 상처 준 기억을 떠올리며 힘들어하는 내게 선생님은 사진 한 장을 보내주었다. 사진의 의미를 묻는 내 질문에 별다른 설명 없이 짧은 답신이 왔다. 


"우리의 수업도 이런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닐까요."



그 사진은 피카소 자신이 그렸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 자신을 되풀이하고 그리다 보면 본질적인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일까? 이런저런 상상을 해봤지만 이제 감정을 고르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그 끝을 미리 알 수 없는 일 같았다. 그것을 당장에 알고자 하는 것은 조급 함일 테니 말이다. 이 사진을 마음의 서랍 하나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철학수업을 만나고 내 삶의 각도를 조금씩 틀며, 조금씩 나를 확장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걸어온 길이 조금 더 눈에 띄던 어느 날, 이 사진이 불현듯 다시 떠올랐다.  


바로 "아이-되기"였다.

     



라파엘로처럼 그리기 위해 4년이 걸렸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평생을 바쳐야 했다.
- 피카소  -    


피카소는 대가(라파엘로)의 규칙을 성취하는 것보다 그 규칙을 깨는것(어린아이)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규칙이 없다. 그래서 자유롭다. 그리고 한계가 없다. 그러나 이미 어른이 된 상태에서는 그 규칙을 제거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12세경에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릴 수 있었다고 자신했던 피카소였지만 이미 고전주의적 기법을 습득했기에 오히려 천진난만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피카소는 그림을 그릴 때 계속 질문했다.  “초상화를 그릴 때는 위에 있는 것을 그려야 할까, 얼굴 내부를 그려야 할까, 아니면 얼굴 뒤를 그려야 할까?” 규칙이 많은 어른은 그 규칙을 알아차리고 의심함으로써 규칙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나 무너뜨리기 이 전에 먼저 규칙을 알아야 한다. 세상의 규칙이 무엇이었고, 내게 어떤 규칙이 내면화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규칙은 누구에게 선인지 물어야 한다. 무엇이 나를 더 기쁘게 하는 것인지 질문해야 한다. 그래야 기존의 그 규칙을 잊고 나만의 규칙으로 만들 수 있다. 배운 것을 잊음으로써 다시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상에 적응하는 일이다. 내가 아닌 타자의 세계에 적응하는 일이었다. 한때 세상의 부조리와 모난 것들이 눈에 들어와 따가웠고, 문제에 가까이 갈수록 불에 데이는 고통이었다. 그 불편함을 견뎌보려 발버둥 쳐봤지만 상처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당시 힘없고 우둔했던 시기에 좌절이 반복되다 보니 난 세상과 싸우기를 피했고 오히려 세상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하면서 부조리함을 받아들이게 되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살잖아" 하면서 관성적 삶과 쉽게 타협했다. 


아이가 된다는 것은 어른이 되면서 금기당했던 것들, 어른이 되면서 포기했던 것들, 어른이 되면서 상실했던 것을 되찾는 과정이다. 어린아이는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매혹적인 것을 본능처럼 알아낸다. 좋아하는 것을 보면 바로 얻으려고 하고, 좋아하는 것을 빼앗기면 바로 울어 버린다. 나는 이 기쁨을 알아채는 센서가 많이 고장 나 있었다. 나이가 들 수록, 사회적 타이틀이 많아질수록 좋은 사람, 이해심이 많은 사람, 젊잖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박처럼 나를 굳어 버리게 했다. 성숙한 척하느라 '진짜 나의 마음'을 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계속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할 때 기쁨을 느끼는 존재일가? 그리고 무엇을 할 때 슬픔에 젖는 존재일가? 이것의 답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는지 알아야 윤리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슬픔이 되는 일을 줄여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된다는 것은 망각할 줄 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금세 잊어버린다. 어린아이는 상처받은 일을 쉽게 잊어버린다. 아이에게는 가능성이 더 많아서일까? 아니면 누적된 상처의 경험이 적어서일까? 아이들은 속상해서 크게 울다가도 다음날이 되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씩씩하게 살아나간다. 슬픔과 아픔에 집착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에 매여있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가 누적된 어른은 그 상처가 잊어버리겠노라 몇 번을 선언해도 머릿속에서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아이가 씩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않고 새로운 기쁨을 생성해 나아갔기 때문이지 않을까? 아이들은 속상한 일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관심과 사고의 전환이 빨리 일어난다. 새로움을 만나면 신기해 하고, 아름다움 것을 보면 경이로움을 느끼고, 놀라운 장면을 보며 감탄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며 자신의 느낌을 신뢰한다. 아이들은 오늘도 새로운 놀이를 하며 새로운 기억을 생성해 나갔기에 아팠던 기억을 뒤로 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명랑하다. 그들은 유쾌하고 활발하다. 




Le mystère Picasso (1956)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맹인의 직업이다. 그는 자기가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을 그리며, 스스로에게 말한 것을 그린다.
- 피카소-


   피카소의 이 말에서 '보는 것'은 지각에만, 혹은 특정 감각에만, 또는 삶의 한 부분만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피카소가 그리는 대상은 보이는 것(일부분)이 아닌, 느끼는(전체적인) 것이었다. 여러 감각을 통해 알게 되는 것, 지각으로는 알 수 없는 의미를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피카소의 비밀>(1956)에는 피카소가 자신의 그림을 다시 그리는 장면들이 나온다. 여기서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을 수정, 삭제, 덮어쓰기를 반복하며 마치 아이가 놀이를 하는 듯 움직인다.


 피카소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자신을 잊었다. 반복되는 연습, 반복되는 작업을 통해 기존의 자신을 지우고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냈다. 그는 계속 창조했다. 어제의 자신을 지움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창조하고, 또 미래를 창조해 나갔다. 피카소의 이 그림에서 알게 된 것은 어린아이처럼 상상하고, 어린아이처럼 움직이는 것, 상실한 것에 집착하지 말고 있는 것에 계속 덧붙여 그려나가는 것, 그런 자신을 신뢰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예술가가 작품을 창조하듯, 인생을 창조적으로 산다는 것은 계속되는 반복에 있다는 것이다. 반복을 통해 앞선 것을 덮고 새로움을 생성해 내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을 반복해서 그린 피카소처럼,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걷기를 반복하는 아이처럼, 나 또한 내게 있었던 기쁨과 슬픔의 기억을 글로 쓰면서 반복했다. 과거에 있었던 기쁨과 고통이 현재의 내게 반복되었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삶에서 다시 재생시켜 봄으로써 난 그 기억을 좀 더 객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기쁜 만큼 기뻐하고 슬픈 만큼 슬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움도 생성해 낼 수 있었다. 나 자신을 새롭게 자각하게 된 것이다. 내가 과거와는 다른 존재임을 좀 더 분명히 자각하게 되었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음을 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피카소가 예술을 창조했듯이 우린 모두 자기 삶의 창조자이다. 주어진 운명의 재료가 아닌, 그 재료를 운용할 수 있는 창조적 연출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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