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컨스터블 <구름 스터디>
가족 간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부모교육이란 것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남산 도서관에서 열린 대화법 교육에 참여했다.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고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그중 한 여성분의 인사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분은 남산으로 올라오는 동안 느끼는 대기의 냄새가 좋다고 했다. '대기'에 냄새가 있다고? 연극을 한다던 그 여성은 정말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마음이 뭉클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대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날의 감동은 일렁거리다가 이내 가라앉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따금씩 그 여성의 말과 표정 그리고 봄비가 내리던 남산이 풍경이 떠올랐다. 이후 대학원에 입학하여 미술 매체 연구하며 모래를 만지던 날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모래 놀이터에 많이 다니기는 했지만 나 혼자 모래를 가지고 논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모래를 손으로 만지고 떨어 뜨리며 장난을 쳤다. 그러면서 어릴 적 기억이 스쳤다.
구름을 보고 멍 때리는 날의 풍경이었다. 어린 시절 하늘에 움직이는 구름을 보면서 상상놀이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내가 보았던 파란 하늘색, 뭉텅이 져있던 구름,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노란 햇살, 그 자연과 함께 있던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구름관찰자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날 이후 어린 시절의 많은 기억들이 떠올랐고 감수성이 다시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구멍을 막고 있던 것들이 녹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자연을 느끼며 하늘을 보며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서양 미술가 중에는 탁월한 구름관찰자가 있다. 영국의 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은 구름의 모양을 통해 하늘을 관찰했다. 맑은 날, 흐린 날, 폭우가 치는 날 등 다양한 하늘을 관찰했다. 하늘의 구름을 사랑한 존 스터블은 구름이 매일매일 변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매일 변화하는 구름을 그렸다. 구름의 모양이 계속 변화하는 이유는 구름이 생기의 대기의 조건이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그 조건에 따라 하늘은 다양한 색을 보여준다. 하늘은 계속 변화한다. 우리는 하늘의 맑은 날을 보며 언제나 맑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흐린 날을 보며 언제나 흐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은 매일 변하며 그 변화됨을 믿는다.
삶에서는 어떨까. 힘든 날이 오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 불안해한다. 맑은 날이 오면 그날이 끝나지 않기를 기원한다. 맑은 시기가 지나 어둠이 오더라도 다시 구름 걷힌 날씨를 보이는 것이 하늘이고 인생이지만 그런 변화에는 둔감하다. 하늘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늘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눈앞에 삶에 지쳐 하늘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보는 하늘과 어른이 보는 하늘이 같을 수 없다. 아이는 책임감이 없다. 상처도 적다. 그리고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어른은 이미 많은 상처를 입었다. 회복되지 않은 것도 많다. 하지만 이미 상처받은 어른이,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어른이 아이처럼 하늘을 볼 수 있다면, 하늘과 자신이 하나라고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자신의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닌, 가리는 것이 아닌, 지우는 것이 아닌, 자신의 상처를 품고도 자연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면, 자연과 자신이 하나인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아름다움이 아닐까. 아름다움은 상처와 치유가 반복되는 파노라마다. 하늘이 그것을 매일 우리에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