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순수함(비폭력)과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 「휴머니즘과 폭력」메를로 퐁티
메를로 퐁티는 우리의 몸이 존재하는 한 폭력은 숙명적으로 자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 아침에 먹은 달걀은 병아리가 될지도 모를 잠재된 생명이었으며, 점심에 먹은 삼겹살은 살해당한 돼지의 죽은 고기이며, 저녁에 먹은 복숭아는 미래에 커다란 나무가 될 씨앗이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폭력임을 안다고 해서 내가 먹기를 거부한다면 나는 죽는다. 내가 살아 있는 한 폭력은 불가피한 것이다. 나의 존재는 폭력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존재 자체가 폭력인 셈이다.
메를로 퐁티는 비폭력과 폭력이라는 양극단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폭력과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흑백논리에 빠지는 결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비폭력과 폭력 사이에 있는 다양한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다.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이 될까?
"중요한 것으로 우리가 토론해야 할 것은 폭력이 아니다. 폭력의 의미 내지는 폭력의 미래이다. 이것은 미래를 향해서 현재를, 타자를 향해서 자기를 뛰어넘는 인간적 행위의 법칙이다. 「휴머니즘과 폭력」메를로 퐁티
문제는 폭력 그 자체가 아니다. 폭력이 가져다줄 미래의 의미인 것이다. 폭력이 불가피하다면 그 폭력을 하려는 이유, 그 의미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를 넘어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생존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라면 활동에 필요한 만큼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논쟁한다면 그 논쟁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그 목적 그 의도에 맞는 폭력을 선택해야 한다. 최소한의 폭력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순수함(비폭력)으로 위장하지 말고 정직해야 한다.
최우람 < 천사> 2022
# 일상의 폭력
메를리 퐁티의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일상의 폭력에 대해 되돌아보아야 했다. 나는 어떤 폭력 속에 노출되어 있을까? 정말 나 또한 폭력배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삶의 폭력이 있었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나는 삶이 "기분좋고, 안정되고, 유려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때때로 삶의 풍파를 만났으나 안정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안정되어야만 한다"라는 당위적 기대를 가진 사람이었기에 불안정은 곧 불행이라는 도식이 있었다. 그랬기에 불안정한 것, 불편한 일들은 회피하거나 발생한 일들은 기억 속에 억압시키곤 했다.
문제는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은 후 드러나게 되었다. 억압된 폭력의 기억들이 되살아 난 것이다. 처음 책을 읽고 난 후에는 한 달간 악몽에 시달렸다. 하지만 도무지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폭력의 상처가 너무 깊게 억압되어 형체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불쾌하고 답답한 감정뿐이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내면 깊숙이 새겨진 상처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무의식 속 기억이 조금씩 전의식 단계로 떠오르게 되었고, 부유하는 기억들의 퍼즐들이 조금씩 맞추어진 것이다. 마치 <채식주의자>의 등장인물들이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기만의 트라우마와 조우한 것처럼. 독자인 나도 그들의 과정을 치렀다.
<채식주의자>는 '폭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흔히 신체적으로 구속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것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다양한 폭력이 등장한다.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드러나게 폭력적인 사람은 아버지의 역할로 등장한다. 아버지는 폭력 앞에 이 단서를 단다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이 말을 통해 부모는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주인공 영혜는 갑자기 고기를 먹지 않기 시작한다. 몸은 바싹 말라가고 얼굴은 생기가 없다. 이를 본 아버지는 딸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고 한다. 아무리 달래고협박까지 해도 말을 듣지 않는 딸의 뺨을 때리며 신체적 폭력을 가하고, 억지로 딸의 입을 벌려 고기를 쑤셔 넣는다. 반항하는 영혜를 보며 남동생은 "누나, 웬만하면 먹어. 예, 하고 먹는 시늉만 하면 간단하잖아."라고 하며 폭력을 묵인한다. 엄마는 말라가는 딸을 위해 흑염소즙을 내어 온다. 그러나 영혜는 엄마가 사 온 흑염소즙을 모두 쏟아 버린다. 이를 안 엄마는 "이걸 버려? 니 에미 애비 피땀이 어린 돈이다. 그러고도 내 딸이냐?"라고 말하며 딸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딸을 원망한다. 남편은 이 모든 폭력 앞에 구경꾼이 된다. 그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일 뿐이다.
폭력은 신체적 폭력만 해당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강요하는 일체의 것을 포함한다. 방법적으로는 달래기, 권유하기 등이 시도되지만 이에 응답하지 않으면 협박으로 이어진다. 요즘엔 이를 언어폭력, 정서 폭력이라고도 말한다. 또한 주변인들도 이 폭력에 묵인과 무관심으로 가담한다. <채식주의자>에서는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와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남동생, 엄마, 남편이 등장한다. 이들 모두 아버지의 폭력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폭력인 영혜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고,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고 강요한다. 그렇게 모두 폭력의 공모자가 되어간다.
내 삶에서도 신체적 폭력, 강요와 협박, 묵인, 외면, 무관심 그리고 방관의 형태로 폭력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피해자였던 기억으로 점철되었다. 직접적 피해 사실과 함께 내가 폭력을 당할 때 그 상황을 묵인했던 주변인들도 함께 떠올랐다. 그들은 때로는 가족이기도 했고 학교 선생이기도 했고 친구이기도 했다.
또한 나는 폭력의 가해자 이기도 했다. 비록 신체적 폭력은 없었지만 상처주는 말을 총알에 담아 기관총을 난사했다. 내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또한 폭력을 방관하기도 했다. 갑질당하는 직장 동료의 억울함을 묵인했고, 약자의 고통에 무관심했다. 특히 아이들이 나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나의 부모가 했던 것처럼 "다 너를 위한 거다"라는 말을 하며 강요를 되풀이하기도 했다.
우리가 더 작은 폭력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피해 넘어 '너'의 피해를 고민했을 때 가능하다. 내가 피해자로 남아 있을 때 세상의 폭력은 나를 빼고 존재하는 절대 악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너'의 피해를 고려한다면 '악'은 나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일 된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생각한다면 나의 행동과 말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최우람 <작은 방주> 2022
# 친절한 얼굴의 폭력
이런 조심스러움에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널 위해 그런 거야"라는 말이다. 이 말은 참 교묘하다. 자신의 의도를 숨긴 채 강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널 위한 거야"라는 말은 왜 폭력이 될까? 널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말을 하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 속 영혜의 아버지는 영혜의 말라가는 몸을 보고 속이 상했다. 딸의 몰골을 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던 아버지는, 빨리 그 힘듦을 해결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영혜의 뺨을 때리고 입을 억지로 벌려 고기를 쑤셔 넣었다. 그녀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딸을 사랑하는 엄마의 지극한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며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영혜에게 흑염소를 달여 먹인다.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영혜의 고통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널 위해 그런 거야"라는 친절한 말속에 '너'는 없었다.
이런 사례는 소설 속에서나 있는 극화된 이이기가 아니다. 요즘엔 자녀를 존중한다고 하면서 '권유형'을 쓰는 경우가 많다. 나도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에 '권유형'을 남발했다. 나는 미소 띤 얼굴로 "네 방좀 치워 줄래?"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찍이 언어감각이 탁월했던 아이는 권유형과 명령형을 구분할 수 있었고, "싫어!"라고 짧고 선명한 의사를 밝혔다. 그 순간 스파크가 일어난다. "난 친절하게 말했는데, 너는 왜 듣지 않니?"라며 진짜 의도가 드러났다. 내가 친절해 보이는 말투를 쓰면 '너'는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강요이다. 친절을 가장한 강요. '너'가 선택해야 할 질문속에 '너'는 없었다. 너의 대답에 '나'만 있을 뿐이었다. '너'를 통해 '나'의 생각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저 친절한 얼굴을 한 파시스트와 다름아니었다.
특이 친절한 얼굴을 한 강요는 문제가 된다. 강요받는 느낌이 들지만 그 강요가 친절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진다. 의도를 숨긴 가짜 친절이기 때문이다. 메를로 퐁티의 말에 따르면 의도를 숨긴 친절한 표현도 폭력의 일종이다. 우리는 순수함(비폭력)과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할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설득을 위한 말이었다면 친절로 위장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나'를 위한 말이었다면 '너를 위한 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한다. 강요된 친절은 '너는 선택할 수 있지만 선택할 수 없다'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정신적 혼란을 불러온다. 폭력은 불가피하다. 그러기에 '나는 폭력적이지 않다' 오만함을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서로에게 조심할 수 있다. 그래야 미래의 의도에 맞는 그 만큼의 작은 폭력을 선택할 수 있다.
진정 '너'를 위하는 것은 친절한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친절한 말투나 밝은 얼굴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론 너를 위해서, 미래의 의미를 위해서 가혹한 말, 따끔한 훈계가 필요할 때도 있다. 그 많은 폭력 중 어느 폭력을 선택할 것인가? 친절한 파시스트가 될 것인가? 정 많은 욕쟁이 할머니가 될 것인가? 고민해 봐야 한다. 정말 '너'를 위하고 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