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였을까. 바다에 갔다. 찰랑찰랑한 바닷물이 조금씩 쓸려 나가더니 어느덧 저 멀리 하늘 귀퉁이까지 밀려나버렸다. 기억에 있었던 그 바다처럼 찰랑찰랑하길 기다렸지만, 야속한 바다는 모두 쓸려 나가 버렸다. 바다를 만나지 못해 실망한 나는 모래밭에 주저앉아 버렸다. 바닷물이 언제 밀려 들어올지 모르기에, 내가 떠나기 전까지 안 올 수도 있기에, 어린아이마냥 애가 탄다.
물이 빠져나간 바다에 시커멓게 검은 갯벌이 드러났다. 검은 갯벌. 무언가 많은 것들이 숨 쉬고 있다고는 들었었다. 하지만 그 갯벌이 반갑지가 않다. 나의 바다. 나의 바다. 나의 바다. 오직 나의 바다만이 간절할 뿐.
저 멀리 한 아이가 운다. 갯벌에 놀러 온 꼬마아이와 젊은 아빠가 보였다. 아이는 갯벌에 들어가기 싫다고 한다.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색이 무섭다고 한다. 아빠는 먼저 갯벌로 들어가 호미질을 한다. 조개를 찾아내고서는 아이에게 보여준다. 아이는 조개를 보고 신기해한다. 아이는 조개를 찾아 조금씩 조금씩 바다로 발을 옮긴다. 아이는 갯벌의 끈적임이 익숙해졌는지 까르르 웃는다.
<흐른다>, 23-7-23, 파스넷과 수채물감 등
나도 갯벌에서 조개를 찾을 수 있을까? 나도 갯벌에서 웃을 수 있을까? 내 마음속 시꺼먼 갯벌을 그린다. 종이 한가득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이지만 그것을 다 꺼내기엔 감당이 안된다. 검정으로 칠을 시작했지만 반을 채우지 못한 채 멈추었다. 갯벌에 들어간 아이의 장화처럼 손가락에 먹물은 묻힌 후 갯벌에서 놀아본다. 찐득찐득한 무거움이 손끝을 타고 가슴으로 들어온다. 손가락을 바꾸어 가며 리듬을 타 보았지만 여전히 갯벌은 무겁게 나를 끌어내린다.
저 끝으로 사라진 바다를 그렸다. 아스라이 멀어진 바다. 흰 거품을 내며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바다. 눈에 보이지만 따라갈 수 없는 만큼 거리기 생긴 바다를 숨죽이며 본다. 쓸려나간 바다, 쓸려나간 추억, 쓸려나간 마음.
하늘이 보였다. 그래 하늘. 내 시야에는 바다뿐 아니라 하늘도 있었지. 바다도 그랬지만 하늘도 나의 세상이지. 하늘에 가볍게 색을 펴 주었다. 뭔가 계속 갈증이 났다. 좀 더 물이 필요했다. 사라진 바닷물을 대신할 물. 하늘에 물을 펴 발라 주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 더 많이 더 많이.
하늘에서 물이 또록 맺혔다. 흘러내리지 못하는 눈물이 맺혀 있다. 좀 더 많은 물을 칠하자 눈물이 또르르 흐른다. 하늘에 가득한 슬픔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 물이 갯벌까지 흘렀다. 팽팽한 긴장감이 터지고 무거웠던 마음이 울컥하고 흐른다.
상실의 무거움이 터졌다. 언제 비가 그칠지는 모르겠다. 언제 밀물이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밀물 썰물은 그저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채워질 때가 있으면 비워질 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자연의 이치를 유연하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쓸려 나가는 바닷물도 쥐고 싶어 할 만큼. 눈물이 흐르는 순간에서야 알았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제야 나의 비워진 바다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지독한 상실감 마저 흘러가고 있었다.
구름 뒤 어딘가에 태양이 있다. 실컷 울고 난 후, 구름이 가벼워지고 난 후 태양은 그 빛을 드러낼 것이다. 지구가 돌면서 밀물이 찾아들 것이다. 그날이 언제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바다는 알고 있다. 밀물과 썰물을 담는 바다는 알고 있다. 그 담대한 바다 옆에 몸을 맡긴다. 바다는 내 마음도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