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짐에 대한 변명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때는 선생님들이 생활기록부에 곧잘 '산만하다'는 표현을 써주셨다.
산만하다, 산만하여, 산만해서..
의미를 해석해 보면, "떠드는 아이,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라는 부정적 의미의
완곡한 표현이다. 부모님에게 건네는 최소한의 예의였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산만했다. 어릴 때부터 어디에 집중하는 일 따위 거의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수업을 듣는 일에 익숙치 않았으며
도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꼼지락댔다.
내가 조용히 있는 유일한 경우는,
산만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온통 휘감겨있을 때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보니 그 순간만큼은 그래도 조용해지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말을 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다른 할 말이 떠올라 주제를 바꾸는 경우가 허다하다.
집중하지 못하고, 집중하지 못하니 고요하지도 않다.
그러다 보니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꽤 어질러져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그렇다.
얼른 다른 주제와 소재를 말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또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정말 산.만.하.다.
그래서 글도 짧게 쓰고, 말도 한 가지 주제로 오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늘 새로운 게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건,
내 직업과 성격이 꽤 어울린다는 것이다.
산만하면, 그만큼 머리가 빨리 도는 것에 익숙해지고
그렇게 일 평생을 지내다보니 왠만해서는 다양한 주제가 닥쳐도 겁먹지 않게 된다.
내 머릿속은 다양한 주제를 짧게 생각하고 털어냈다가 또 후다닥 생각하는데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산만한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이렇다,
어느 하나에 깊게 들어갔다가도 금방 빠져나온다.
왜냐하면 다른 여러 주제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할 말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
그리고 하나 하나 차근 차근, 단계를 밟아나가며 진행하는 것이 아니기에
여러가지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에 능하다.
(대신 하나의 주제를 여러 번 나눠 생각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그래서 순간의 아이디어는 풍부해지는 반면, 여러가지 일을 벌려 감당 못할 때가 많다.
그래도 까먹지 않고 미루지 않는다.
앞서 얘기했지만 차근 차근 하나를 끝내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일을 하기 때문에 굳이 하나를 끝내지 않고도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의 장점은 '포기'하는 경우가 적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남들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뿐.
산만하다의 '산만'은 다들 알고 있겠지만 한자다.
둘 다 흩어진다는 의미를 갖는 한자어인데,
풀자면 흩을 산(散), 흩어질 만(摱)으로 이뤄진 단어다.
'흩을 산'은 확산, 분산, 해산 등에 쓰이는 한자어이고
'흩어질 만'은 방만, 만화, 만연 등에 쓰이는 한자어이다.
그러니까 결국 '산만하다'의 의미는 정돈되지 않고 흩어져있다의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역으로 데이터를 보는 직업과 꽤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 자체가 흩어진 정보를 모아서 질서정연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산만한 나에게는 더 없이 어울리는 직업이 아닌가.
아직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산만하다는 표현이 예전부터 꽤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마치 모자란 것 같은, 자기 통제도 안되는 것 같은 사람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산만하다'는 의미가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산만하다'는 의미를 '산(山) 만큼 크다.'로 생각해도 되는 세상이다 지금은.
다른 사람의 지적에 흔들리지 마세요.
다르면 못하는 거라고 배척하는 세상 따위, 나도 달갑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