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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ansGoog Nov 06. 2018

나의 '홀레 아주머니', 아니 '아가씨'

수 많은 선생님과 그리고 내 아내

'선생이 부모 같을 수는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 경우는 '부모 마음은 일반적으로 저렇구나' 혹은 '자녀가 자라나며 부모에게 품는 애틋함이란 통상 이런 것이겠구나'를 선생님들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유추하고 체감해갈 수 있었다. 처음부터 갖고 있지 못하였던 어떤 원형이,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내 안에 만들어넣어진 셈이다.
 .
 "홀레 아주머니"라는 게르만 옛이야기에는 우물가에서 날마다 손가락에  피가 날 정도로 많은 양의 베를 짜는 소녀가 등장한다. 어느날 피로 물든 실타래를 씻다 물에 빠뜨린 소녀는, 의붓어머니의 질책에  못이겨 그것을 찾으러 깊은 우물 안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친어머니의 손길을 지닌 홀레 아주머니를 만나, 제대로 된  보살핌과 가르침을 얻는다.
 .
 내게는 대학원 진학이, 말하자면 그 우물이었다. 소녀가 우물 아래에 어떤 아름다운  장면들이 펼쳐질지 미처 예상 못한 채 그저 현실이 고통스러워 무작정 뛰어들었듯 나 역시 그러했다. 고시공부만큼은 싫었고, '명문대 이름 걸고 깝죽대는 대학생 강사 새끼' 소리 들으면서 자정까지 입시학원 알바하지 않아도 조교일하며 다닐 수 있다기에 일단 발을 떼었을 뿐이었다. 시작은 그랬다. 그러다 우물 안에서 그 이론들을 읽었고, 글자들을 얻었고, 그리고 나의 홀레 아주머니'들'께 닿게 되었던 것이다. 모교 울타리 안과 바깥을, 내 전공의 내부와 외부를, 그리고 학생시절과 그 이후를 넘나 들며  그분들께 살뜰한 보살핌과 가르침을 받았다. 온갖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많이 받았다. '


- 페이스북 '이소영'선생님 포스팅 중 -




이 선생님 글 읽다가 많은 분들이 떠올랐다. 눈가가 촉촉해지면서, 고마움의 눈물이랄까.

많은 사람들 중 바로 생각나는 사람은  바로 '두구두구두구' - 따라!! 지금 한 집에서 사는 와이프다.


 5년 전 그녀가 예뻐서 열심히 쫒아다녔다. 나보다 몇살 많았고 당시 일하는 직장에서 바쁜시기 통과하던 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특기인 집요함(나이 몇살 먹으면서 무모함은 다듬어서 쫒아다녔다)이 결혼이라는 말도 안되는 행복에 이르게 했음을 자부한다. 아내는 진가는 만나가며 더 느껴졌고 지금도 그러한데 가장 큰 것은 바로 '공감'과 '근거없는 믿음' 이었다.


  난 어린 시절 그냥 학교 가는게 좋았다.  선생님들이 가르치고 책에 나와있는 사실들 대로 살려고 했다. 그저 한국 교육시스템에 잘 적응했던 나였다. 그러다 무목적인 두려움이 생긴 시점이 이때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때가 있었다. 아직도 첫번째 중학교 중간고사 성적표 받은 날을 기억한다. 난 반에서 5등을 해갔었다. 열 세반이 있던 학교에서 우리반 5등을 해서 '아쉽고 뭐 집에 가면 혼나긴 하겠지만 좋네.'하며 친구랑 신나게 축구하고 흙먼지 뒤집어 쓰고 갔던 집에 어머니께 성적표를 내밀었다. 하지만,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강도의 혼을 났다. 그 때 이렇게 생각했던거 같다. '무조건 일등 하자'. 그때부터 가장 친한 초딩때 친구는 공부를 참 잘하고 좋은 친구인데 밉기도 했고, 그 당시 예뻐서 말 걸고 싶었던 한 아이도 전교 일등이라 미워했었다. 학교 공부 단체로 잘하는 친구들이 많은 고등학교가서 스트레스는 있는데로 다 받았다. 그 마음자세는 많은 걸 나에게 가져다 주었지만 속이 썩어갔음을 다시금 느낀다. 그냥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 그저 내가 열심히 하면 되는 것임을 스스로 느낀건 요 근래다.


 부모를 욕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아이라도 선택의 과오는 사람이라면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굴 탓하랴. 그저 모든 일, 사건이 새옹의 말과 같은 것이 세상의 일임을 좀 알겠다, 이제.


 아내는 날 만났던 처음부터 내가 이해가 안된다는 얼굴이었다. 아내는 그렇게 매사에 살아오던데로 사는 당신이 대단하다고 늘 말해줬다. 그 말이 처음엔 연인이 서로에게 흔히 말하는 칭찬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다니던 대학원의 생리에 너무 힘들었었고, 제일 큰 것은 대학원 공부 말고 다른 의미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한참을 찾던 때였다. 그 말은 신기하게 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석박사 통합과정을 별 고민없이 선택한 것에서 석사로 마침표를 찍고, 그만두고 나와 서른의 나이에 여섯달 이유모를 두려움을 안고 병역의 의무를 치룰 방법을 찾다가 병특기관에 합격,  광주에서 3년간 지내고 지금은 다른 일을 하려고 한다. 아내를 만난 모든 순간 '공감'과 '근거없는 믿음'을 주었다. 과언이 아니다. 돈 한푼 없던 내가 결혼을 생각해서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된 가장 큰 이유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내에게도 그런 존재 이고 싶었다.


 이소영 선생님이 언급하신, 옛 게르만 이야기의 '홀레 아주머니'는 지금 아내이다. 물론 아내 뿐이겠냐만 내가 아내에게 홀레 아저씨가 되주고 싶기에 가장 먼저 적어본다.


 생물학을 실제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하며 배운 대학원생활이 내게 준 것은 내가  과학을 파묻혀 사실들을 찾는 것 보고 오히려 사람과 대화를 하고 과학을 잘 전달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깨닿게 해줬다. 실제 논문을 쓰는 연구자는 아니지만 세상에 가치있는 것을 만들수 있다 생각한다. 적어도 과학덕후 될 자신은 아주 많다.


 다음번엔 인생의 지침을 바꿔놓은 선생님들을 써보고 싶다. 기억속에 수 많은 '홀레 아저씨, 아주머니들' 기다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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