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영흥도 공사장에서 60대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온 후 이주 뒤에 인천 연수구의 공사장에서 40대 노동자가 추락사했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그들의 사인은 불가항력에 의하지 않는다. 추락을 방지하는 안전장치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자동으로 리프트를 멈추는 인터록은 미래에 개발 예정인 기술이 아니다. 어째서인지 노동자를 보호하는 기술은 이미 있는데도 현장에는 없었고, 이미 있어도 발휘되지 않았다. 그 결과 노동현장에서는 어김없이 산재가 발생한다. 2022년에는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가 827명이라고 한다. 부상자는 그보다 많을 것이다.
산재 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사회 전반에 가득한 악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한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은 분명한데, 그 실체가 흐릿하여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사고가 발생하면 이는 현장관리자의 잘못인가, 티오를 넉넉하게 주지 않은 중간 관리자의 잘못인가, 하청을 준 대기업의 잘못인가. 한 번에 여러 사람이 죽으면 대서특필하여 언론에서 난리가 나는데, 그때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자는 책임이 있는 듯하기도 하고 없는 듯하기도 해서 아리송하다. 죄의식은 누구에게나 물을 수 있어서 누구도 지지 않는 듯하다.
왜 죽음이 빈번한 곳으로 몰리는 자들이 외면당하는가.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우연이 겹쳐 일어난 자연재해도 아니고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었던 사고도 아니다. 이전에 일어났던 사고가 같은 곳에서 발생하고 원인 또한 이전의 사고와 똑같은데, 여전히 안전수칙은 지켜지지 않아 같은 사고가 발생하고 사람이 죽어간다.
현장에 나가는 사람들은 대개 저학력자에 넉넉지 못한 형편인 사람들이다. 이제 노동자들은 하청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고 한 데 묶여서 위험하고 더러운 일들을 감당한다. 그 반대편에서는 이 같은 행동이 기업의 합리적 이윤 추구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라는 등의 말들이 오간다.
한 번에 여럿이 죽으면 모두가 애도하지만 여러 번에 나눠 죽으면 관심이 흩어진다. 어제오늘 발생한 일이 아니어서 그럴까, 관례처럼 일어나는 인재는 너무도 빈번하여 무감각해진 듯하다. 2022년에는 하루에 2~3명 꼴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단순 계산으로 어제도 죽은 사람이 있고 오늘도 죽은 사람이 있다.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