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우리 어머니가 팔십 평생을 회고하며 자신 있게 못된 사람 만난 일 없다고 술회할 수 있듯이 세상엔 믿을 만한 게 훨씬 더 많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쉬 잊고 배신을 오래 기억하며 타인에게 풍기지 못해 하는 것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바탕이 결코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24
계획된 시간을 예기치 않은 일에 빼앗길까 봐 인색하게 굴다 보니 거의 시계처럼 살려니 꿈이 용납되지 않는다. (중략) 시계처럼 산다면 제법 정확하고 신용 있는 사람 티가 나지만 시계가 별건가. 시계도 결국은 기계의 일종이거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사람이 기계처럼 살아서 어쩌겠다는 걸까.
-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66
'광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도 말짱 헛것인 게,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인색하다. 넉넉하다는 게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이라면, 요새 부자는 늘어나는지 몰라도 넉넉한 사람은 자꾸만 줄어드는 것 같다.
-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91
한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의 토씨 하나만 바꿔도 세상이 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손바닥의 앞과 뒤는 한 몸이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뒤집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가장 먼 상대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도 그와 같은 게 아닐까. 뒤집고 보면 이렇게 쉬운 걸 쉽지만, 뒤집기 전엔 구하는 게 멀기만 하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128
필자는 노래를 못한다는 생각에 하루종일 우울해하지만, 친구의 "너가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하니."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잘하는 게 노래말고도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필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소한 약점에 대해 고민 또 고민한다. 하지만 이런 고민들은 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자신의 약점보다는 강점에,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에 집중해보자. 아마 나 자신이 좋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작가가 될까 말까 하던 4년 전의 고민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216
작가의 눈에는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성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한테 미움받은 악인한테서도 연민할만한 인간성을 발굴해낼 수 있고, 만인이 추앙하여 마지않는 성인한테서도 인간적인 약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게 작가의 눈이다. 그리하여 악인과 성인, 빈자와 부자를 층하하지 않고 동시에 얼싸안을 수 있는 게 문학의 특권이자 자부심이다. 작가의 이런 보는 눈은 인간 개개인에게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나 제도를 보는 데도 결코 달라질 순 없다고 생각한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236
그러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일생 끌고 온 이 남루한 여행가방을 열 분이 주님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서는 허세를 부릴 필요도 없고 눈가림도 안 통할 테니 도리어 걱정이 안 된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247
오늘 살 줄만 알고 내일 죽을 줄 모르는 인간의 한계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만약 인간이 안 죽게 창조됐다고 가정하면 생명의 존엄성은 물론 인간으로 하여금 사는 보람을 느끼는 모든 창조적인 노력도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중략) 때로는 나에게 죽음도 희망이 되는 것은 희망이 없이는 살아 있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264
계절의 변화에 신선한 감동으로 반응하고,남자를 이해관계 없이 무분별하게 사랑하고 할 수 있는 앳된 시절을 어른들은 흔히 철이 없다고 걱정하려고 든다. 아아, 철없는 시절을 죽기 전에 다시 한번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283-284
젊을 때는 많은 부분에서 처음이라 미숙하고, 그렇기에 다소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청춘은 유한하고, 또 다시 오지 않기에 아름답다. 지금 내 나이면 청춘인 것 같은데, 한 번뿐인 청춘을 허비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