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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천 Dec 18. 2022

공짜 창의성은 없다.

생각의 기쁨


  요새 글쓰기에 약간의 슬럼프가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글감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의 밑천이 드러난 느낌이랄까. 그러던 중에, 친구에게 책을 하나 선물받았다. 제목은 <생각의 기쁨>. 어쩌면 이 책이 나의 고민을 조금이나마 해결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빨리 읽기 시작했다.



'나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 (중략)
한 줄의 글인데 꽤 오랜 시간 눈을 뗄 수 없더군요. 이런 게 좋은 문장의 마력 같습니다. 속으로 수십 번 생각했지만 명확하게 정리할 수는 없었던 어떤 생각의 덩어리에, 한 줄의 문장이 통과하는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거죠.


-> 책의 서론에 있는 문장이다. 내가 글을 쓸 때마다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글 전체를 아우르는 '한 방'이 부족하다는 점인데, 이 책을 통해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책을 선물해준 친구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꼈던 부분이다.


'아이디어를 잘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중략) 당연히 비법은 없습니다. 대신 경험에서 얻은 약간의 팁은 있습니다. 낙차를 만드는 겁니다. '하던 대로'의 방식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겁니다.


-> 쳇바퀴 돌아가듯 살면 머리가 굳고, 생각이 고인다. 그래서 창의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장소에 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안 해본 것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데이원 활동들은 나에게 너무 소중하다. 요새 글이 잘 써지지 않는 이유도 아마 집에서만 글을 쓰려 해서가 아닌가 싶다. 새로운 영감을 위해 보다 다양한 곳에서 한 번 써봐야겠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던 시간과 장소에 패턴이 있다면, '생각의 법칙' 같은 걸 발견할 수도 있을 텐데요. 하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괜찮은 생각이 태어나는 정해진 장소나 시간은 없는 것 같습니다. (중략) 다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까지 '흐름'상의 공통점은 있었습니다.


-> 잡지 투고에 어떤 글을 쓸지에 대한 고민을 거의 한 달째 하고 있다. 이렇게 제시된 주제를 기반으로 글을 쓰는 건 과제 말고는 처음이라 더더욱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아침, 운동을 갔다가 샤워를 하면서 좋은 영감이 떠올랐다. 이를 토대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한, 좋은 글을 써봐야겠다. 요즘 정체되어 있다 느껴지는 내 글쓰기 실력 향상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글이란 결국 정확히 작가가 가진 것만큼을 내놓는 일이다. 작가가 가진 깊이만큼의 그릇에. 작가의 경험과 세계관을 통해 만들어진 생각을 채워넣는 일이다.


-> 좋은 글을 위해선 작가의 다양한 경험과, 이를 통해 얻은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난 아직 한참은 멀었다. 글을 쓰다 보면 쓰고자 하는 바는 있는데, 언어로 표현이 안 된다. 아직 배움의 깊이가 부족해서인가 보다.


그러니 창의력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태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 완성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고, 훈련 또한 '스스로' 시간을 투입해 수행해야 하는 일인데 말이죠. 그래서 크리에이티브해 '보이는' 요령은 있을지 몰라도, 금방 크리에이티브해지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 학창 시절, 나는 창의성이 타고나는 것인 줄 알았다. 톡톡 튀는 생각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워했고, 또 질투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창의성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다. 많이 보고, 듣고, 쓰고, 또 말하는 것이 곧 창의성으로 이어지는 열쇠인 것이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독서 모임 활동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또 뭐든 왕도는 없다는 것도!


하지만 한계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 때,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위안이 되더군요. 이것은 정말 벽일까. 아니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계단의 초입일까. 부디 이것이 계단이기를. 언젠가,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다음 계단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기를.


-> 올해 종영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나희도는 실력이 늘지 않아 발레를 그만두겠다는 딸 민채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실력은 비탈이 아니라 계단처럼 늘어." 처음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건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것도 몰랐던 상태이기에 조금만 노력해도 변화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이에 재미가 붙어 더 열심히 하게 된다. 그러나 언젠가는 정체기가 오고, 이를 못 견뎌 포기하는 게 부지기수다. 어쩌면 정말 조금만 더 하면 한 계단 더 오를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계단을 오를 때의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짜릿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발상은 짜내는 것이 아니라, 채운 것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도록 해야 한다. (중략) 사람의 생각은 치약과 같습니다. 억지로 짜내면 어떻게든 나오지만, 그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 책을 읽으면서 계속 느끼는 건데, 좋은 발상을 위해선 넓고 깊은 경험이 필수이다. 내가 글을 쓸 때를 생각해 보면, 예전에 봤던 책이나 글의 문장을 인용하기도 하고, 나의 이야기를 서론에 넣어 내용을 전개하기도 한다. 또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아 문체가 바뀌기도 한다. 책을 읽을수록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던 과거의 내가 떠올라 조금은 후회되는데,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많은 이들이 깊이 사랑하는 콘텐츠에는 대체로 여백이 있습니다. 보는 이가 끼어들 틈이 있습니다. 그 틈에 자기를 집어넣고 그 노래, 영화, 그림을 자기만의 버전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죠. (중략) '완결된 무엇'도 좋지만 '들어올 여지'는 더욱 좋습니다. 때론 빈틈을 조금 열어 보이고, 그 빈틈을 상대가 채우게끔 해보세요.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만들어보세요. 완벽한 메시지를 발산하겠다는 생각을 살짝 내려놓아보세요. 빈틈에는 중력이 있고 매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던 많은 순간들이 사실은, 완벽해 보이던 사람이 빈틈을 보일 때가 아니었나요?


-> 발표를 한다 해보자. 이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누군가는 글자로 꽉 채워진 ppt나 빈틈없는 내용으로 무장한 발표문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로 구성된 발표는 아마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다. 너무 꽉 차 있어 듣는 이에게 생각할 시간을 전혀 주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몇 개의 사진만 넣은 ppt와, 적절한 침묵으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발표문이 더 호평을 받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이는 사람보다는 약간 챙겨 주고 싶은 사람이 더 인기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걸 보면, 너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빈틈이나 여백은 그 자체로 다른 매력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책장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재미있는 결론에 이르더군요. 그건, '나의 책장이 꼭 완벽하고 거대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나보다 좋은 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 책장에서 굳이 답을 찾느니 그 분야에 정통한 남의 책장을 열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에게 없는 책을 내가 가지고 있다면, 나 또한 나의 책장을 언제든 활짝 열어주면 되지 않을까요?


-> 예전에는 남에게 물어보는 걸 싫어했다. 모른다는 걸 인정하기가 부끄러웠고,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모르는 정보를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걸 잘 아는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것임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읽었던 책을 교환하듯이, 서로의 지식을 교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건강한 윈윈 관계가 되는 것 같다. 앞으로도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내가 아는 분야를 누군가 궁금해하면 열심히 설명해줘야겠다.


우리는 회사로 돌아가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식판인지 평판인지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말을 듣기 전과 들은 후의 저는 좀 달라졌어요. 일을 대하는 태도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거든요. 우리가 마주하는 일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한 일과, 양질의 생각이 필요한 일 말이죠. 그날의 대화를 마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모든 일에 절대적으로 같은 수준의 생각을 투입할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 일에는 두 가지의 '판'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밥벌이에 도움을 주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한 식판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역량을 보여주는, 양질의 생각이 필요한 평판이다. 식판에 해당하는 일은 꼭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다지 많은 생각을 요하지 않는다. 반면, 평판에 해당하는 일은 많은 정성과 생각을 요한다. 이렇게 성격이 아예 다른데, 이 둘에 같은 수준의 생각을 투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대단히 비효율적일뿐더러 결과도 좋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집중력과 의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택과 집중'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싶다.


'단순함은 궁극의 정교함이다.' 이 말은 분명 스티브 잡스가 했다고 믿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말의 원전을 찾아보니 놀랍게도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한 말이었습니다. 21세기에 전 지구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 가슴에 품은 문장은, 15세기를 살았던 거장의 입에서 나왔던 겁니다.


-> 어떤 분야에 정통한 사람은 이를 설명할 때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반면 얕고 좁게 알수록 설명이 장황해지고, 중언부언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단순함을 구현하려면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선택과 집중도 적절히 해야 한다. 그래서 '궁극의 정교함'이라는 표현이 사용됐으리라. 나는 아직 단순함을 구현할 만한 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 잡지 기고문을 쓰면서도 분량을 줄여야 했고, 그 과정이 매끄럽지 못해 다소 만족스럽지 못한 글을 제출해야 했다. 언젠가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순하고, 담백하게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돌아보니 결국은 '나'이더군요. 내게 없는 것을 남들이 가지고 있다고 부러워하고 따라 해 본들 그것은 그저 흉내에 불과하더군요. 저 하수구망의 어설픈 영어 문장처럼 말이죠. 분명한 사실은, 당신이 남들의 어떤 부분을 부러워하는 만큼,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당신의 어떤 부분을 부러워하고 있을 거란 사실입니다. (중략) 나는 나이기 때문에 가치 있고, 나다울 때 가장 빛납니다.


->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정말 빛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나에게 없는 그림 실력, 손재주, 운동 신경 등을 가지고 있기에, 만날 때마다 나의 부족함을 상기시킨다. 예전이었다면 나는 왜 저런 능력을 가지지 못했는지에 대해 푸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들도 각자의 약점들이 있으며, 내가 그들을 부러워하듯이 그들 역시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조급해질 때마다 이렇게 되뇐다. '쟤는 쟤고, 나는 나야.'


'관심을 가지면 보인다. 믿음을 가지면 보이지 않는다.' (중략) 우리가 무언가에 관심을 가질 때,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안다고 믿는 순간, 세상을 바라보던 그 창문을 닫게 됩니다. 우리는 대체로 아는 것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도, 의심을 하지도 않으니까요. 남들의 조언에 귀를 열지 않고, 새로운 지식들을 채워넣으려 하지도 않으니까요.


->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보다 더 무서운 건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아는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제멋대로 신념을 가지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만큼 꼴불견은 없다. 그런데 돌아보면 나도 한 번쯤은 저랬을 것 같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항상 의심하고, 열린 자세로 받아들이자.




  콜럼버스의 달걀 이야기를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동글동글한 모양의 계란을 아무도 세우지 못할 때, 콜럼버스는 계란의 밑 부분을 살짝 깨트려서 세웠다. 언뜻 보면 발상만 조금 바꾸면 되는 일이지만, 이 작은 생각 하나를 위해서는 넓고 깊은 경험과 끊임없는 사색이 필요하다. 우연히 얻어지는 창의성은 없기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 실패해봐야겠다. 이제는 우물 안에서 나올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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