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남자를 조사해 보면 늘 상위권에는 ‘잘난척하는 남자’가 빠짐없이 자리하고 있다. “뭐 좀 남자가 그 정도 허세쯤은 있어야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허용치를 넘어가는 노골적인 자기 자랑에서 발생하는 거부감은 불가항력적이다.
그런데 최근 병원 광고를 보고 있자면 잘난척하는 남자가 불가항력적으로 떠오른다. 신동엽의 위트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수위조절’이라고 하는데,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최근 병원 광고 콘텐츠의 수위 조절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내용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다. 장비 자랑, 이력 자랑, 규모 자랑 그리고 인테리어 자랑. 물론 이런 것들이 필요 없지는 않다. 하지만 기왕이면 자기 자랑도 좀 세련되게, 좀 자연스럽게 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최소한 거부감이 들지는 않게 말이다.
개원 마케팅을 진행하면서 생각보다 병원이 잘 된 적도 있었고, 본의 아니게 병원이 잘 안 된 경우도 있었다. 안 되는 병원의 원인을 분석해 본다면 여러 차원에서 각각의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마케터의 제한된 시선에서 ‘이거다!’라고 명쾌한 진단을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마케터의 관점에서 다소 크리티컬한 해석의 진단이 가능할 수는 있겠다.
한 번은 공학도 출신이었던 원장님과 마케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공학도 출신의 엘리트답게 상당히 꼼꼼한, 딱 떨어지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셨다. 인테리어부터 시작해서 아주 작은 부분들까지 본인이 직접 챙기는 부지런한 분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인테리어는 멋졌고, 누구보다도 잘 될 것 같은 조건을 두루 갖춘 병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 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딱 떨어지는 걸 좋아하고, 원장님이 직접 작은 부분들까지 챙기려고 하다 보니 콘텐츠는 원장님의 스타일데로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원장님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내용이 전략적으로 나열되는 콘텐츠만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콘텐츠의 내용 역시도 기존 병원의 자랑과 크게 차별화되지는 못했다. 결과 역시 그리 좋지는 못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차별화되지 않는 노골적인 자랑 형식의 광고 콘셉트가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랑을 나열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이 차라리 낫다. 딱 떨어지는 자랑을 차갑게 나열하기보다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펄떡 거리며 살아 숨 쉬는 이야기들이 콘텐츠의 방향성이 돼야 한다.
한 번은 페이스북 뉴스피드에 뜬 영상을 보고 눈물이 난 적이 있다. 영국의 한 달리기 선수가 올림픽 결승전에서 허벅지 뒤쪽의 햄스트링이 파열되면서 꼴등을 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냥 꼴등은 아니었다. 100m도 채 달리지 못하고 쓰러진 그가 다시 일어나 뛰었기 때문이다.
스태프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그는 끝내 절뚝거리며 경기장을 돌아 완주했다. 순위와 관계없이 절뚝거리며 경기장 트랙을 마저 돌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400m 달리기에 출전했던 데릭 레이먼드(Derek Raymond)라는 선수의 이야기다.
그에 반해서 나는 우사인 볼트(Usain Bolt)를 보고는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는 언제나 1등이었다. 그가 승리 후에 신발을 관중석으로 던지는 세리모니를 보며 “저 스프린터화에서 발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하며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는 했지만, 그의 승리를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왜 그럴까?
언제나 승리하는 우사인 볼트를 보며 내가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상당히 기계적이었을 것이다. 매번 1등을 하니 거기에 또 한 번 1등을 더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애써 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찾아보진 않았지만, 간혹 보이곤 하는 가십성 기사에도 그가 남아도는 힘을 클럽에서 쓰고 있다는 풍문을 보고 들은 정도일 뿐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콘텐츠의 방향성이 우사인 볼트가 아니라 데릭 레이먼드로 가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우사인 볼트가 그냥 공짜로 1등을 했다는 말이 아니다. 타고난 신체적인 조건과 함께 고통스럽게 반복되는 훈련을 감내한 값진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마케터로서 소비자들의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콘텐츠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인사이트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구글, 코카콜라,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정상 기업의 커뮤니케이션을 매니지먼트했던 카민 갤로(Carmine Gallo)는 최근 저서인 『최고의 설득』(The storyteller's Secret)에서 하디라는 스토리텔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사람들은 실패를 이해할 때까지는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아요. 실패와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청중들과 감정적 유대를 맺을 수 있어요. … 일단 감정적 유대를 맺으면 원하는 곳으로 데려갈 수 있어요.”
우리는 올림픽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힘껏 달려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픈 환자의 마음을 향해 가는 길은 우사인 볼트처럼 힘껏 내달려 1등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사인 볼트의 ‘차가운 승리’가 아니라 데릭 레이먼드의 ‘뜨거운 실패’가 더 필요한 이유이다. 자랑하지 말자. 환자가 떠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