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장에는 읽다 만 책들이 가득 쌓여 있다.
역사를 다룬 무거운 교양 도서부터 신기한 세상이 가득한 과학 도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재기 발랄한 에세이까지. 여기에 현실에 보이지 않는 전자책까지 추리면, 그 수는 어마어마하다. 언제쯤 다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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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무조건 완독하려 했다.
어떻게든 그 한 권을 다 읽으려 몸부림치던 때가 있었는데, 때마침 샀던 책들 중에 무게가 족히 1킬로그램은 넘는 몇백 페이지의 책들이 있었다. 독자 리뷰에도 “차라리 전자책으로 사서 들고 다니며 읽을 걸 그랬어요.”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큰 책을 완독하려고 버티다 보면 해가 훌쩍 넘어갈 것 같았다. 커다란 장벽 앞에 나는 자연스레 고집을 버리게 됐다.
나의 산만한 성격도 한몫했다.
특히 어려운 책은 읽으면서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야 했다. 그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뼛속부터 문과인 탓에 과학 도서는 아무리 지도를 그려도 시작점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한 권 다 읽고 나면 진이 빠졌다. 지루한 책은 그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다. 마치 영화관에서 잘못 선택한 영화를 끝까지 봐야 하는 고충이었다고 할까. 어쨌든 돈 주고 산 책은 다 읽자는 주의라 읽긴 읽어야 하는데, 이게 만만치 않았다. 영화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내 앞에서 비추다가 사그라들지만, 책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내가 속도를 내지 않으면 책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이러한 이유로 얼떨결에 번갈아 가며 읽는 습관이 생겼다. 골고루 읽되 힘들면 돌아가는 전략이다. 업무와 관계있는 교양 도서도 읽고, 단어의 보물 창고 같은 고전도 읽는다. 국내 소설에 관심이 멀어진 것 같으면 소설 쪽으로 눈을 돌려본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두꺼운 책도 읽다가 현재 보류 중이다. 지루한 책은 훨씬 긴 호흡을 두고 천천히 읽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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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갈아 읽기에도 나름대로 나만의 규칙이 있다.
첫째, 구조가 복잡해 보이는 소설은 웬만하면 며칠 내로 완독할 것. 안 그러면, 나중에 주인공 이름도 까먹게 된다. 사실 구조가 복잡하지 않더라도 소설은 그 자리에서 읽는 것이 좋은 듯싶다. 끊어 읽다 보면 몰입도가 금세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둘째, 웬만하면 ‘장’까지 읽을 것. 장은 책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다. 도중에 어정쩡하게 멈춰 서지 말고 그 장을 끝맺음한 뒤, 다음 장 앞에서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책을 닫는 재미가 쏠쏠하다. 중간에 멈추고 나중에 책을 폈을 때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아 다시 돌아갔던 기억이 제법 있다.
셋째, 책이 망가지지 않도록 주의할 것. 나 같은 경우에는 읽다 만 책을 우선 이불 근처에 놓았다가 나중에 찾아서 읽는 편인데, 아무렇게나 놓다 보면 나중에 책이 망가져 있어 속상할 때가 많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읽다 만 책을 자신의 생활 반경 주변에 놓을 것이다. 아니면, 가방에 늘 넣고 다닐 수도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책이 망가질 수 있으니 주의해서 나쁠 건 없지 않을까 싶다.
넷째, 새 책을 사도 좋다. 읽다 만 책이 아무리 쌓여 있고 그 책이 왠지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아도,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잠시 접어 둔 책들은 가끔 나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그럴 때는 뻔뻔하게 넘어가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비 오는 어두컴컴한 밤에 읽다 만 무서운 책을 차마 꺼내기 힘드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며, 꿀꿀한 분위기를 달랠 만한 에세이를 손에 든다. 숙제 같은 독서지만, 게으름을 피우며 그 속에서 재미를 찾아가는 중이다.
가뜩이나 독서가 의무 같은 편집자 생활에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꾸준히 읽고 있는 셈이니 뭐라도 되지 않을까. 나름 있어 보이게, 지금 읽고 있는 에세이의 한마디로 정리해 보려 한다.
“좋아서 꾸준하게 하는 일의 무시무시함이라니….” (출처: 『아무튼, 발레』, 최민영 지음, 위고, 2018년,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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