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까일 거 일단 벌려놓고 보자
종종 찾아 읽는 공간이 있다. 예스24에서 만날 수 있는, 웹진 ‘채널예스’다.
채널예스는 나에게 의무나 다름없다. 한참 원고에 매달리다 보면, 가끔 내가 어디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지 까먹을 때가 많다. 나만 이렇게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헉헉대며 책을 만드는 걸까? 숨 가쁘게 달리다가 현타도 온 김에 숨을 고르며, 괜히 채널예스에 들어가 본다. 어떻게 보면 딴짓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책을 만들어내는지 아무리 바쁘더라도 가끔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야 회의 때 뻐끔뻐끔 대답만 하고 마는 붕어 신세를 면할 수 있으니까.
채널예스에서 ‘제목의 탄생’이라는 칼럼을 만났다. 5권의 책을 골라서, 그 책을 만든 편집자가 왜 그런 제목을 짓게 되었는지 간단히 이야기하는 형식이다. 원고에서 어떠한 인상을 받았는지, 가제에서 어떠한 흐름으로 제목을 발전시켜 나갔는지, 작가와는 제목을 두고 어떻게 소통했는지 한 문단에서 편집자의 활약이 명료하게 그려진다.
그렇다면 나는 어땠을까? 제목회의에서 늘 까이고 마는 탓에, 어느 순간부터 내가 어떻게 제목을 짓는지 잊고 산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꾸역꾸역 되짚어보는 나만의 제목 탄생기. 이 탄생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어차피 까일 거 일단 벌려놓고 보자’다. 단, 나름 최선을 다해. 당연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원고를 교정하는 과정에서 눈에 들어오는 문장을 모두 긁어서 하나의 파일로 모아둔다. 이때는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 판단하지 않고 우선 담고 본다. 이후에 영 쓸모없는 문장은 지운다. 보통은 초고를 기준으로 이러한 발췌 작업을 한다. 교정을 거친 문장으로 발췌하다 보면, 작가의 의도와 살짝 멀어질 수도 있어서다.
간혹 비슷한 문장이 겹칠 때가 있다. 몇몇 작가는 자신이 강조하고픈 내용이나 책의 주제를 여러 번 등장시킨다. 흐름상 중요해서 자주 언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게 바로 내가 하려던 말이야!’ 하고 독자가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채기를 바라며…. 기획안을 정리하면서 이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더라도, 발췌한 것들을 모아 읽어보면서 ‘작가가 이 내용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구나.’ 하고 다시 한번 깨달음을 얻곤 한다. 그리고 이를 제목이나 카피에 어떻게 활용할지 대강 밑그림을 그려본다.
뽑아낸 문장을 다시 읽어보며 체에 거르듯 그 속에서 ‘단어’만 추려낸다. 그 단어가 곧 키워드가 된다. 보통은 하나의 원고에서 키워드를 5개 내외로 잡는 편이다. 그보다 많은 키워드가 걸러진다면, 그중에서 우선 5개만 골라내고 나머지는 다른 한쪽에 보관해둔다. 선택받지 못한 키워드라도, 훗날 보도자료나 홍보용 자료에 쓰일 수 있으니 버려서는 안 된다.
나의 경우에는 5개 키워드 중에 한두 개 정도의 키워드를 조합하여 제목을 만드는 편이다. 그럴싸한 제목회의를 위해 개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 한 가지 사실을 명심한다. ‘어차피 선택되는 제목은 하나다.’ 어차피 하나만 빼고 다 까일 테고 어쩌면 아무것도 선택되지 않을 수 있지만, 낙선된 제목 후보들은 선택받지 못한 키워드처럼 언젠가는 쓰이기 마련이다. 제목이 아니면 부제라도, 카피라도, 뒤표지 문구라도. 즉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너무 대충 제목을 짓지는 않아요.’
원고의 핵심은 보통 가제(원제)가 갖고 있다. 편집자 눈에 가제가 못 미덥더라도, 작가가 그 제목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가제와 키워드를 조합하면, 그동안 머릿속에 떠올려본 것과 다른 색다른 제목이 튀어나온다. 단기적으로는 제목회의에서 제목 개수를 늘릴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가제를 활용한 제목을 내세웠을 때 작가를 설득하기 쉽다. 결국은 작가가 제목을 허락해야만 책을 낼 수 있으니까.
이 책을 읽을 독자가 누구냐에 따라, 제목의 향방도 달라진다. 어떠한 연령대의 독자가 읽을지, 그 독자의 관심사는 무엇일지, (어린이·청소년 책의 경우) 이 책을 사줄 사람은 어떤 단어에 끌릴지, 독자가 이 책에서 무엇을 얻고 싶어할지 찬찬히 고민하다 보면 명쾌한 답을 얻기도 한다.
1차로 만들어낸 제목 반죽의 휴지가 끝나면 이리저리 모양을 다듬어볼 차례다. 명사로 깔끔하게 끝맺을지, 문장형으로 친숙하게 다가갈지, 아니면 물음표를 덧붙여서 궁금증을 유발하거나 질문을 던져볼지, 고민하다 보면 답이 나온다. 이때는 책의 분야가 중요하다. 아무래도 학술 서적에 문장형을 적용하는 것은 어려울 테니까.
또한 기존에 나온 책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괜찮아 보였던 책 제목에 원고의 키워드를 집어넣어 보면, 어울리는지 아닌지 쉽게 가늠해볼 수 있다. 물론 무조건 따라 해서는 곤란하고, 어울리는지 정도만 파악하는 용도로 활용해야 한다. ‘이 책처럼 문장형으로 하는 건 영 어울리지 않네.’ 하고 깨달음을 얻을 정도로만.
요새 또는 몇 년 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신조어를 활용해보는 것도 좋다. ‘밀당’이라든지 ‘일잘러’나 ‘인싸’라든지. 주식이나 요리 등 독자층이 명확한 책이라면, 해당 분야의 독자들이 커뮤니티 등에서 자주 꺼내는 말들을 모아놨다가 섞어 쓰는 방법도 있다.
그럼에도 제목이 잘 지어지지 않는다면, 순서를 바꿔 부제를 먼저 만드는 방법도 있다. 즉 생각해보긴 했지만 제목이 되기엔 뭔가 아쉬운 것들을 부제로 삼고, 그에 어울리는 제목을 그다음에 지어보는 것이다. 의외로 통하는 방법이다.
제목을 얼추 지어놨다면, 그 제목들을 인터넷 검색창에 하나씩 올려봐야 한다. 90% 이상 같거나 아예 똑같은 제목은 제목회의에서 내려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창작력이 부족한 탓인지 종종 겹치는 제목을 발견했다. 눈물을 머금고 Delete 키를 누르는 수밖에….
커버 사진: 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