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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른히 Feb 20. 2021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다

『야생의 위로』를 읽고

겨울은 소란스럽게 지나가는 중이다. 따뜻해지다가도 금세 식기를 반복하면서.

며칠간 밖을 나설 때 얼굴에 와 닿던 찬 바람은 잠시 물러나고, 날은 푸근해졌다. 일기예보의 말로는 곧 쌀쌀한 바람이 돌아온다고 하니, 분명 겨울은 우리 곁에 아직 머물고 있다.


그러고 보면, 겨울은 ‘가라앉는’ 계절이다.

하늘을 뿌옇게 흐려놓고 땅바닥에 ‘착’ 가라앉는 눈송이처럼, 마음이 ‘축’ 하고 가라앉는 계절. 유독 올해는 그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모두의 마음속을 무겁게 짓누르는 무언가가 아직 떠나지 않았으므로. 그러다 어느 책을 읽고 ‘아, 겨울은 이런 계절이지.’ 하고 깨달았다.  


10월 말에 이르자 지치고 기분이 가라앉는다. 겨울이 되면 일조량 결핍과 그에 따른 세로토닌 분비 감소로 계절성정서장애라는 일시적 우울증이 일어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겨울의 일조량 부족에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민감한데, 이들의 경우 신경전달물질 배출량이 더 크게 변동하여 11월부터 3월까지 무기력과 기분 저하를 느끼게 된다. - ‘머리말’ 중에서      


출처:  『야생의 위로』(심심, 2020년)


『야생의 위로』(에마 미첼 지음, 신소희 옮김, 심심, 2020년)는 ‘산책길 동식물에게서 찾은 자연의 항우울제’라는 부제에 걸맞게 자연에서 마주한 씩씩한 동식물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25년간 우울증 환자였다고 고백하며 시작하는 이 책에서 작가 에마 미첼은 혹시 모를 오해를 막기 위해 자연의 치유 효과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를 본문 곳곳에 풀어낸다. 작가의 세심한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2007년 마드리드대학교와 노르웨이생명과학대학교의 합동 연구서에 따르면 자연경관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나 정신적 피로의 해소가 촉진되며 질병에서 회복되는 속도도 빨라진다고 한다. 2017년 엑서터대학교에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도시 환경 속 식물의 존재는 거주자의 우울증과 불안, 스트레스 인지도를 떨어뜨린다. 야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기분 저하를 완화한다는 점도 같은 연구를 통해 확인되었다. - ‘머리말’ 중에서     


이 책에는 10월부터 다음 해 9월까지 1년간의 ‘위로’가 담겨 있다. 집 주변을 산책하거나 숲과 바닷가를 거닐고, 때로는 차 안에서 도로변을 내다보다 만나는 수많은 동식물이 그것이다.


‘나뭇잎 사이에 숨는 데 능숙하며 성미가 다소 비밀스러운’(‘10월’ 중에서) 상모솔새부터 ‘이따금 이삭 속에서 동면하는 무당벌레’(‘11월’ 중에서), 그리고 ‘길가에 무더기로 핀 흰 꽃’(‘2월’ 중에서) 스노드롭까지, 작가는 놓치지 않고 포착해낸다.


사진으로 스케치로 담긴 자연의 모습은 그것을 위안으로 삼으려는 작가만큼이나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를 선사한다.  이파리와 열매 하나하나마다 회복력이 깃들어 있다.


나는 색채를 탐색한다. 겨울이 다가올수록 가능한 한 자주 숲과 산울타리에서 밝은색을 접하고 싶어진다. 하늘이 찌뿌둥하게 흐린 날에도 숲속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을 색채를 찾아 집을 나선다. 지난달에는 화살나무 낙엽이 내 기운을 북돋워 주었는데, 이번 달에는 화살나무 열매가 무르익어 생생하다 못해 환상적인 분홍색과 주황색을 과시하고 있다. - ‘11월’ 중에서     


야생당근과 서양톱풀 이삭은 회갈색으로 말라붙었고 마지막 민들레꽃은 사라졌으며, 풀밭을 둘러싼 오솔길은 잿빛 진흙탕으로 변했다. 엽록소의 생생한 초록빛이 그리워지지만, 다행히 얼음에 굴복하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주홍빛 장미 열매를 발견한다. - ‘12월’ 중에서   

     

작가가 거주하는 영국을 무대로 한 이 책에서는 간혹 생소한 풍경이 펼쳐진다. 동식물은 물론이거니와 영국의 숲과 토양,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자세도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하지만 친절한 묘사로 낯선 이미지들은 충분히 머릿속에 하나둘 자리를 잡는다.


자연에서 위안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겪어봤을 일이건만, 작가의 1년이 유독 뭉클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울증의 기세에 짓눌러가다라도 자연의 손길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고자 노력했던 그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울한 마음을, 지난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그 믿음 하나가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 결국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다.     


음울한 계절이면 내가 찾아다니는 이런저런 사소한 광경이 있다. 미세한 식물학적 지표들, 결국에는 봄이 오고 말 거라며 나를 안심시켜주는 기분 좋은 신호들이다. 지난달에 나타난 사양채와 갈퀴덩굴 새순처럼 이 꽃차례 배아도 그런 신호 중 하나다.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다. 밤은 짧아질 것이며 내 생각들도 다시금 밝아지고 가벼워지리라. - ‘11월’ 중에서



커버 사진: Photo by Aniket Bhattachary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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