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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른히 Jun 02. 2021

언젠가 만나요, 신입 번역자님

비록 오지랖에 불과할지라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편집자로 일해오면서,
나는 종종 신입 번역자와 일하고 싶었다.

많은 번역자가 프리랜서로 일하니 ‘신입’이란 표현은 그렇지만, 내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이제 막 출판 번역자로서 걸음마를 뗀 사람이다. 역자 소개 글에서 자신의 번역 이력보다 자신이 번역을 배워온 과정에 대한 부분이 더 많은 사람.   

 

그 사람들과 일하고 싶었던 데는 딱히 이유가 없었다. 그저 순전히 오지랖이었다.

아직 출판 번역자로서 이름을 내걸지 못했거나 한두 걸음 걸음마를 뗀 수준에 불과한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번역 솜씨가 꽤 좋은데도, 번역한 책이 아직 없다는 이유로 상사로부터 그 번역자가 반려될 때 괜히 내가 아쉬웠다. 신입 시절의 내가 떠올랐던 걸까. 어쨌든 역시 이유는 오지랖밖에 없다.     


나는 대부분 번역 에이전시를 통해 번역자를 만났다.

즉, 번역 에이전시에 원서 원고를 보내고 번역자를 소개받고 이후 번역 원고를 받는 것으로 만남이 이루어졌다. 에이전시가 끼어 있으니 번역 계약부터 번역 탈고까지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얼굴을 보지 못한 번역자가 대다수고, 에이전시를 통해 연락하는 탓에 번역자의 연락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번역 에이전시에 원서 원고를 보낼 때면, 매번 하는 일이다 보니 기계적으로 임하게 된다.

먼저 간략한 책 소개와 함께 해당 분야에 맞는 번역자들로 샘플 원고를 받아 달라고 요청한다. 물론 에이전시에서 알아서 잘 해주지만, 전문성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특별히 한 줄 더 메일에 써넣는 편이다.

대개 일주일에서 열흘 사이에 샘플 번역 원고 여러 개가 도착하는데, 이때 신입 번역자가 포함될 때가 더러 있다. 에이전시에서는 경력이 아직 부족하지만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마디 건넨다. 나는 그 말을 담아 두었다가, 내부 논의를 거쳐 최종 번역자를 선정한다.

우선 1차로 내가 한 번씩 읽어보고 상사에게는 간략한 의견과 함께 샘플 원고를 전달했다. 해당 분야의 번역 이력이 많거나 출판사와 몇 번 작업해본 인연이 있으면 대개 그 사람으로 바로 결정되지만, 보통 상사의 의견으로 번역자의 운명이 갈린다.


샘플 번역 원고를 살펴볼 때면, 한 가지 문제에 부딪히고는 한다.

의외로 샘플 원고의 상태는 고만고만하다. 물론 전문성이 비교적 필요하지 않을 때 한하지만. 아마 많은 번역자가 번역을 충분히 공부하고 본격적인 번역의 세계에 뛰어들기 때문에 차이가 크지 않은 듯싶다.

전문성을 무기로 한 번역자는 웬만하면 바로 최종 승자가 된다. 과학책이면 과학을 전공한 번역자의 원고가 아무래도 나은 편이고, 예술책도 마찬가지로 예술에 조예가 깊은 번역자가 유리하다.

하지만 그런 책이 아닌, 대중이 쉽게 읽어 내려가는 책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난도가 낮은 책일수록 그 책의 샘플 번역 원고들은 각각 다른 사람이 번역했음에도 거의 비슷하다. 즉, 누가 나은지 쉽게 판단할 수가 없다.     

Photo by Dee @ Copper and Wild on Unsplash


이 경우, 번역 원고 이면의 것들을 살펴보게 된다. 즉, 번역자의 이력이나 번역 단가 등이다.

번역 단가의 경우 에이전시로부터 샘플 번역 원고와 함께 따로 전달받고, 번역 이력은 샘플 원고 하단의 번역자 소개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제 막 출판 번역가의 삶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력은 눈에 띄게 적다. 아무리 이런저런 자기소개가 적혀 있고, 그것이 꽤 가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로서는 그 번역자가 무슨 책을 번역했는지가 중요하다. 


상사에게 번역자에 대해 보고하려면 경력을 따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연 설명을 하려고 입을 열라치면, 무에 시달리는 상사는 “그래서 그 역자는 어떤 책을 번역한 거야?”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때 아직 국내에 출간된 책이 없다고 하면 상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다른 이야기도 들어보면 좋을 텐데, 바쁜 직장인에게는 핵심이 중요하다.

신입 번역자는 아무래도 번역 단가가 경력 있는 번역자보다 적은 편이지만, 단가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따라서 내가 겪은 바로는 단가는 역자 결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이력이 확실히 비중이 컸다. 출판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사람과의 협업을 걱정하는 사정을 이해한다. 편집이든 번역이든 경력이 없으면 힘든 건 매한가지인 것 같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신입 번역자와 함께한 경우가 드물다.

물론 세상에는 신입 번역자와의 만남을 반기는 출판사가 더 많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몇 번의 시도 끝에 어느 신입 번역자와 일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나는 그 책을 출간하기까지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나의 시도는 매우 소극적으로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짧은 몇 줄로 자신을 소개할 수밖에 없는 그들과 일하고 싶다.

언젠가 만나요, 신입 번역자님.    



커버 사진: Photo by Emma Matthews Digital Content Producti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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