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원고의 출간을 담당하기로 했다면, 먼저 중요한 것은 일정이다.
몇 월 며칠이라고 정확히 정하기 어렵더라도, 적어도 몇 월 언제쯤 출간 예정이라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예를 들면, 7월 초순과 같이.
물론 출간 일정표를 작성할 때는 몇 월 며칠에 입고 예정이라고 날짜를 우선 정해둔다. 하지만 이 날짜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편집 과정에서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착착 진행되기는 힘들다. 편집자가 일정을 맞춰 원고를 살펴보았어도, 작가가 이를 확인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수 있고, 아니면 원고 난도가 생각보다 높아서 디자인 일정이 며칠 늘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어느 정도 작업이 진행된 이후에는 출간일을 딱 정해야 한다. 그래야 마케터가 그 일정에 맞춰서 마케팅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그 날짜에 맞추려 안간힘을 쓰지만, 변수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히 출판사에서 무조건 빨리 책을 내라고 압박할수록, 조급한 마음에 이리저리 허둥대다 보면 변수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그렇게 일정이 늦어지면, 만반의 준비를 마친 마케터 옆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커피라도 한 잔 사서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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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일을 배울 때는 회사에서 책을 빨리 내라고 하면 일정을 어떻게든 최대로 당겼다. 여기서 책을 빨리 낸다는 기준은 원고 교정에서 출간까지 한 달에서 한 달 반이 안 되는 기간을 줬을 때다(물론 원고의 성질에 따라 이 일정 안에 충분히 책을 낼 수도 있다). 아무리 급하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되기에, 가장 당길 수 있는 일정은 편집자, 즉 나였다. 결국, 집에 일을 들고 가서 밤늦도록 일하다가 다음 날 출근하기를 반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질없는 행동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아무리 회사에서 일정을 당기라고 해도, 그것에 충분한 사유가 보이지 않는다면 변수가 생긴다는 가정하에 며칠 더 여유를 둔다. 그렇게 조금 넉넉한 일정으로 출간 일정표를 짠다. 회사에 다니면서, 별다른 이유 없이 무조건 ‘빨리빨리’를 외치는 상사들이 있었는데, 책을 빨리 내라는 건 그저 습관일 때가 많았다. 초반에는 그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였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쏟아지는 신간에 직원들이 모두 힘겨워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만큼 지쳐 있었다.
‘그래, 쉬어가자. 하루라도 쉬어가자.’ 그렇게 결심한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일정이 하루 이틀 늦어지는 대신, 정확성을 기한다는 이유를 댔다. 걱정과 달리, 그 말에 상사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사고 없이 책이 좋게 나오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 역시 ‘빨리빨리’는 습관이었나 보다.
그런데도 책을 무조건 빨리 내야 할 때가 있다.
책이 가진 특수성이나 신간이 너무 없는 탓에 무조건 그달 안에 책을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둘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생겨난다. 예를 들면, 흥미 유발을 위해 구성을 뒤바꾸는 시도를 할 수 없고 작가에게 색다른 제안을 건넬 수도 없다. 부족하지만 주어진 초고 안에서 마무리 지어야 한다. 호흡이든 달리기 자세든 모든 것이 다르다. 마라톤이 아니라 단거리 경주이므로.
물론 짧은 일정 안에서도 어느 것도 내려놓지 않고 살뜰히 챙기는 편집자도 있겠지만, 나는 혹여 일어날지 모를 사고 때문에 주저하고 만다. 즉, 마라톤처럼 모든 걸 안고 가는 모험을 섣불리 선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결과물을 보면 아쉬운 마음만 들 뿐이다. 그런 상황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책들에서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어떤 책을 보면 ‘아, 서둘러 나오느라 이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작가 입장에서도 책이 빨리 나와서 기분이 좋았다가 이내 편집자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 수 있다. 편집자가 자신의 역량을 책에 다 쏟아붓지 못한 것 같아서 말이다. 알고 보면 그 급박한 일정에 책이 나온 것이 편집자의 역량일 테지만. 작가의 그 마음이 얼굴이 그대로 드러날 때면, 나는 미안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일 때가 많았다.
작가 또한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에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전에 편집자도 급한 일정에서 최대한 원고를 꼼꼼히 살펴봐야 하지만 말이다. 즉, 단거리 경주이므로 스타트에 특히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바로 본격적인 작업 시작 전에 원고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보충해야 할 것들을 바로 정리하여 전달하는 것이다.
‘우선 편집자에게 보내놓고, 편집 과정 중간에 내용을 보충해야지’ 하는 생각은 오히려 작가를 힘들게 만들 수 있다. 일정이 급한 탓에 나중에 쫓기듯이 원고를 확인하느라 놓치는 것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편집자는 힘차게 달리기로 정한 이상, 거기에 다른 아이디어를 내기 힘들다. 그러므로 이때 작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교정 전 원고 검토, 당연한 듯한 그 행동이 경주의 결과를 뒤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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