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0 B.C. 산토리니섬 -
오랜지 쥬스가 신선하다. 길거리 나무에도 오랜지가 널려 있으나 먹을 수는 없단다. 그래서 그런지 상점에는 오랜지를 직접 짠 오랜지 쥬스를 많이 판다. 상쾌함이 냉동쥬스의 걸죽한 맛과는 사뭇 다르다. 게다가 이 강렬한 태양빛 아래, 검은 모래사장이 있는 카마리 비치에서 푸른빛의 지중해를 보며 마시는 차가운 오랜지 쥬스는 신선하다 못해 신성하기까지 하다. 산토리니는 흔히들 이온음료 광고에 나온 이쁜 마을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이아 마을이다. 게다가 피라 마을도 있다. 물론 둥근 모양의 파란 지붕에 하얀 집들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파란 색깔의 바다까지 배경에 들어가니 이 풍경의 조화로움은 마치 온탕에서 냉탕으로 들어갈 때처럼 정신을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최첨단 광고로 유명한 곳에도 유적지가 있다니 이 그리스라는 나라는 유적지 위에 세워진 나라 인가 보다. 사람에 치이는 것 보다 유물에 치이는 것이 더 쉽다. 하루는 사각형 바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으니 내려오란다. 3500년전 유물이란다. 호텔 안에도 전시해 놓을 정도로 넘쳐 난다. 10분의 9 정도는 아직 땅 밑에 묻혀 있다고 들었다. 캐도 관리할 예산이 없단다. 그래서 캐고 보고 다시 묻어 둔단다. 그러한 유적지 중 하나가 산토리니에 있는 아크로티리 선사 유적지(Akrotiri Prehistoric City) 이다.
크레타 이라클리온 항구에서 아침 9시 반에 배를 타고 산토리니에 도착하니 11시 반이었다. 우리는 먼저 아크로티리 선사 유적지로 향했다. B.C. 3000년 이전의 유적지로서 약 B.C 1700년 경에 화산 폭파로 인해 땅속에 그대로 묻힌 한 마을 모습을 볼 수 있다. 2층 구조의 건축물부터 중앙 배수 시스템 모양도 그대로 살아 있으며, 마을의 중간은 실재로 내려가 걸어가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2층 구조로 된 담벼락을 보며 골목을 걷다보면 한 고대 그리스인 소년이 골목 모퉁이에서 나를 처다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들기도 한다. 다만 1960년대에 이곳을 최초로 발굴했을 당시 이곳에는 화산으로 덮인 시체 등이 발굴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화산의 경고를 알고 미리 대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그리스인 문화해설사가 설명했다. 그리고는 사진을 보여 주었다. 금으로 된 염소 모양의 조형물이었다. 이 조형물은 발견 당시 한 집의 박스 안에 있었다고 한다. 숨겨 놓은 것을 미처 치우지 못하고 급히 달아나서 나중에 발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다음날 방문한 선사 박물관(The Museum of Prehistoric)에 이 금으로 된 염소 조형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커 보였는데 실물을 보니 약 10센치 정도의 작은 크기여서 다소 실망했다. 박물관에서는 화산을 막아 달라는 제물로 바치고 갔다고 해석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급했던 것은 사실이다.
산토리니는 노을이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급히 해넘이가 가장 잘 보인다는 이아마을로 향했다. 5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안내자가 급한 마음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고 있었다. 몇시에 해가 지나고 묻자 오늘은 8시반 경에 진다고 한다. 3시간 동안 무얼하지? 궁금해 하고 있었을 때 이아마을에 다 왔다며 버스에서 내리라고 한다. 그곳에서 노을을 보고 다시 모일 때 까지 자유시간이란다. 자유시간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한동안 어리둥절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알아서 하라니 너무 한거 아닌가? 우리는 강력한 리더를 원한다.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해 주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원한다. 그래놓고는 마음 속으로 독립을 꿈꾼다. 막상 자유가 주어지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자유에 그만큼 익숙하지가 않다. 나는 일단 걸었다. 마을은 아기자기한 가게들로 가득 차 있다. 기념품점서부터 식당까지. 심지어는 보석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동행이 계속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나의 동료 K군을 따돌리고 혼자 있고 싶었다. K군은 혼자 놔두지 말라는 듯이 나를 따라왔다. 그가 잠시 눈을 팔았을 때 나는 내 발길을 서둘렀다. 그러다 정상에 올랐다. 거기에 오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아마 여기가 노을이 가장 잘 보이는 장소인가 보다. 시계를 보니 5시반이었다. 3시간을 여기서 죽치고 있자니 내 인생이 너무 짧다. 나중에 보니 그곳이 글라스 성채로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란다.
내 동료 K군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골목으로 사라졌다. 이 수많은 골목 속에서 내 자신을 잃어 버리고 싶었다. 헤매다 보면 그곳에 내가 찾던 곳이 있을 것이라 상상했다. 광고나 사진에서 늘 보던 그 모습이 아닌 나만이 찾아낸 곳. 그 곳을 찾고 싶었다. 길거리를 헤메이다 보니 K군이 나를 붙잡았다. 형 어디가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 봤다. 하는 수 없이 그 곳을 같이 찾기로 했다. 그는 이해 못하겠다는 듯이 여기도 좋자나, 여기서 한잔 할까 하며 나는 계속 붙잡았다. 그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그리고는 이아마을 서쪽 끝까지 갔다. 내 눈 앞에는 바다와 해 밖에 없었다. 여기다 싶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넘어가는 순간 미소스 맥주도 내 목을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미소스 맥주를 주문했다. 그리고 앉아서 기다렸다. 해 넘어가는 순간. 노을. 석양. 해넘이. 일몰. 무엇이 맞는지는 모른다. 다만 미소스와 함께라면 이곳의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 것이다.
어둠이 깔리기 전에 우리는 피라마을로 향했다. 피라마을에 도착하니 살짝 밤으로 넘어 가는 순간이었다. 이곳에서도 자유시간과 함께 식사를 하란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아직 저녁식사 전이었다. 시계는 9시 반을 향하고 있었다. 피라는 이아마을과는 다르게 교통과 생활을 중심지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테이크아웃 상점처럼 생긴 곳도 많다. 심지어는 ‘delivery’라고 까지 쓰여 있어서 어디로 배달을 나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언덕위로 올라가니 그곳에는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들이 절벽에 매달려 있듯이 즐비했다. 물론 상점, 기념품점, 아이스크림, 요구르트 가게들로 많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알아서들 밥을 먹으라고 한다.
동행들은 가이드가 가는 곳에서 밥을 먹겠다고 한다. 그래서 가이드가 안내하는 절벽에 위치한 한 고급레스토랑으로 모두들 향했다. 나랑 내 동료만 딴 길로 향했다. 이곳 현지인이 먹는 밥을 먹고 싶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맨 앞에 나와 있는 큰 집을 잘 가지 않는다.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드럼통이 놓여 있는 그런 곳을 찾는다. 같이 가는 사람들은 별로 좋아 하지 않는 눈치다. 나는 그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나보다 더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어찌하냐, 내가 싸구려 인생인 것을. 뒷골목이 훨씬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이게 내 인생인 것을.
나랑 내 동료 K군은 다시 골목을 헤맸다. 그리고 아까 올라올 때 중국 테이크아웃점을 봤다고 했다. 그러자 K군은 거기가 어디냐며 빨리 가자고 했다. 내 뒤를 따라 가봤자 걷기만 많이 하니 아에 거기에 바로 가는 게 낳을 것 같다고 판단한 것 같다. 우리는 절벽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한 곳에서 내려와 동내 아래 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그냥 주문하면 바로 음식이 나오는 테이크아웃 형태로 되어 있는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차이니즈음식점이었다. 메뉴를 보니, 완탕수프가 있었다. 치킨 누들 수프도 있었다. 프라이드 라이스도 있었다. 딤섬에 매운 양념, 그리고 매운 야채 볶음도 시켰다. 다 시켰다. 우리는 허겁지겁 길가에 앉아 먹었다.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미소스 맥주를 마실 순간도 없었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는 순간 창자에 막혀있던 슈블라키(그리스식 고기구이)가 쑥 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속이 뻥 뚫리는 순간이었다. 우리 둘은 눈을 마주쳤다. 서로 엄지를 치켜 올리며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산토리니에서 먹는 치킨 누들 수프가 마카오에서 먹은 것 보다 맛있네.”라고 하자 그도 동의 하듯이 완탕수프를 하나 더 시켜 먹었다. 그 맛있는 미소스 맥주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나중에 자리를 보니 테이블 위에 트레이가 3개 올려져 있고 빈 그룹들이 쌓여 있었다. 내가 화장실을 갔다 오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가 혼자 다 먹었는 줄 알고 놀라면서 지나갔다고 한다. 우리는 뭐가 좋은지 큭큭 거리며 웃었다.
나중에 동행을 다시 만났다. 다소 통통한 여자 H양은 배불러 하면서 흡족한다는 듯이 배를 두드린다. 우리보고 뭘 먹었냐고 물어봐서 우리는 자랑스럽게 “치키 누들 수프”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왜 여기까지 와서 그런 걸 먹냐고 했다. 순간 흥분한 나는 마카오에서 먹은 것보다 더 맛있었다고 하면서 너는 뭘 먹었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랍스터 파스타”라고 답했다. 나는 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90도로 갸우뚱 했다. 더 말했다가는 싸움이 날 것 같아 그냥 마음 속으로 ‘한국에 쎄고 쎈게 파스타 집 아닌가?’라며 읊조렸다. 그러자 그녀도 느꼈는지 여기에 이거 먹으로 왔다고 했다. 나는 좋겠다고 하면서 마무리 지었다. 여기 와서 입으려고 샀다는 그녀의 분홍색 반 팔티에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글짜가 다소 퍼져 보이게 쓰여 있었다. 그녀의 좌우명이란다.
다음날 아침에는 새벽 5시반에 호텔에서 출발했다. 무자키아(Mouzakia) 오솔길을 걷기 위해서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산토리니의 둘레길 정도다. 물론 여기는 이것을 과대하게 포장하여 데크를 설치하거나 대형 안내판을 설치하거나 앱을 만들거나 하지 않는다. 단지 아무도 모를 정도로만 안내판 하나만 길을 걷다 보니 나왔다. 한쪽은 이아(Oia) 마을 쪽이고, 한쪽은 피라(Fira) 마을 쪽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그 중간을 해맞이를 바라보면서 걸었다. 그곳은 약 300미터 이상되는 곳으로 그 주면에서는 제일로 높은 곳이었다. 그렇다고 산가파르게 된 것이 아니라 트레일 정도로 쉽게 걸을 수 있는 정도 였다. 걷다 보니 거의 정상정도의 높이를 걷고 있었다. 사방이 다 보이는 중간 정도였다. 뒤로는 산토리니의 밑쪽 끝인 아크로티리쪽이 보였다. 앞에는 이아마을 쪽이 보였다. 그리고 바다 중간에는 화산섬이 보였다. 해가 동쪽에서 서서히 뜨면서 그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Y 교수님이 “어때요?”하며 물어봤다. 나는 그 바다쪽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눈에 다 담을 수가 없네요.”라고 답했다.
우리 일행은 이아마을이 보이는 작은 교회에 잠시 자리를 잡아 앉았다. 우리 일행을 말씀드리자면 60대로 보이는 부잣집 사모님들이 많았다. 다른 일반 사모님들과 다소 차이를 두자면 지식인 계급에 드는 사모님들이었다. 일반 홈쇼핑 등에서 파는 단체여행은 가지 않고 이러한 교수님과 같이 가는 그러면서 설명을 받아 적고 사진도 찍고 하는 그런 약간 계급이 다른 사모님들이었다. 내가 만나본 새로운 계층이었다. 60대 여자로 남편은 어디 중소기업 사장들이면서, 분당 정자동에 살고, 다 같이 문화강좌를 들으며, 아이들은 이미 결혼하여 독립한 그런 층이었다. 이런 틈새시장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마 그곳이 331미터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교회였던 것 같다. Y 교수님이 물었다.
“어때요? 너무 아름답죠? 시가 저절로 나오지 않아요?”
그러자 한 혼자오신 60대로 보이는 다소 시크한 젊은 아주머니가 말했다. 친구들은 작년에 여기에 와서 올해는 본인 혼자 온 분이었다.
“네, 눈물이 날거 같아요. 썬크림이 녹아서요...”
우리는 다 같이 크게 웃었다. 그리고 내가 회답했다.
“너무나도 감동적인 표현이네요. 그런 시적 표현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어요. ㅋㅋㅋ”
우리는 이후 버스를 타고 선사 박물관(The Museum of Prehistoric)으로 향했다. 어제 방문한 아크로티리 선사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숙녀와 파피루스’, ‘푸근 원숭이’ 등의 커다란 진품 벽화를 보았다. 그리고 3일전부터 새롭게 전시했다는 ‘물고기를 든 소년’ 벽화도 보았다. 금으로 된 염소 조형물은 사진에 비해 작은 크기여서 다소 실망했다. 그러나 그 정교함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은 크기가 내 바지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여서 귀여웠다.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도 않되는 소망을 갖고 우리는 다시 신 항구인 아티니오스 항구(Athinios Port)로 향했다. 이곳에서 다시 페리를 타고 이제 미코노스로 간다.